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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법정에서 만난 세상]좋은 사람들

고제성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장

“모두 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하면서 증인이 갑자기 흐느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피고인이 일하던 두부공장의 사장인 증인은 이 사건과 그다지 관련이 없는데 왜 자기 잘못이라고 할까.

피고인은 증인의 두부공장에서 시장에 있는 가게로 두부를 배달하는 일을 해 왔다. 그러던 중 가게 주인인 피해자 아주머니로부터 예금을 인출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건네받은 현금카드를 이용해 500만원을 인출, 그 돈을 절취했다는 내용으로 공소가 제기됐다.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있어 양형만을 정하면 되는 사건이었다. 피고인은 이미 야간주거침입절도죄로 실형을 받은 전력이 있어 집행유예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계속 울먹거리는 두부공장 사장에게 물었다.

“왜 증인의 잘못인가요?” 증인이 말한 전후 사정은 이렇다. 피고인은 출소 후에 증인의 두부공장에 취직해 100만원 남짓한 월급으로 칠순이 넘는 노모와 고등학생인 딸, 중학생인 아들 그리고 알코올중독자인 동생을 부양하면서 56여㎡(17평)의 임차주택에서 생활해 왔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던 노모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사건 전날 피고인의 딸도 급성 장염으로 입원하게 되자, 병원비가 없었던 피고인이 사장인 증인에게 가불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사정을 알지 못했던 증인은 피고인의 요청을 거절했다. 증인이 그때 가불을 해 주지 못해 피고인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증인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증인의 흐느낌 속에 그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증인은 “피고인은 성실히 일하고 있으며, 앞으로 제가 힘 닿는 데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가족 같이 보살펴 줄 것이니 선처해 달라”고 호소했다.

자신의 직원이 전과범이고 더구나 재범까지 했는데, 증인은 피고인을 해고하기는커녕 피고인의 범행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 살면서 가장 큰 복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재판을 하다 보면 이렇게까지 악랄한 사람도 있을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따금씩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두부공장 사장님, 그리고 “피고인은 원래 착한 사람으로 가족들을 돌보며 어렵게 살고 있으니 피고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라고 진술해 준 피해자 아주머니, 마지막으로 죄는 미워해야겠지만 노모와 딸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피고인, 다들 좋은 사람들로 보였다.

내가 만일 피고인이 처한 상황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당장 노모와 딸의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는데 어디 가서 돈을 빌릴 데는 없고 내 손에 다른 사람의 현금카드가 쥐어져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했을까.

사건에 대한 결론이 섰다. 실형은 무겁고 벌금으로 가자. 벌금으로 가는 마당에 굳이 몇백만원을 부과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피고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그래 벌금 30만원. 검찰도 피고인의 사정을 이해했는지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10여 년 전의 사건인데 유난히 추운 올겨울에 그 사건이 떠오른다.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만 만나면서 재판을 했으면 좋겠다. 너무 지나친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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