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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고]50여년만에 세워진 월남전 참전 기념탑

허단 월남전참전자회 자문위원·수필가

춘천에 첫 기념탑

희생된 전우의 뜻

결코 잊어선 안돼

1960년대 월남전 참전용사들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춘천에 드디어 첫 기념탑이 하늘 높이 솟았다. 2018년 봄 월남전 참전자회 전우들이 춘천역 가까이에 세운 7m의 기념탑은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월남전은 종전으로 치면 45년 전이고 한국군 참전으로 거슬러 오르면 54년 만이니 이미 노령에 접어든 많은 전우에겐 그 감회가 더욱 남다르다. 특히 춘천의 월남군 참전은 총 1,782명으로 군 편제상 역대 규모이니 결코 적지 않은 수다.

대한민국 국군의 첫 월남전 파병은 춘천북방 첩첩산중 접시만 한 파란 하늘이나 쳐다볼 수 있었던 화천의 숨은 요새 오음리에서 시작됐다. 1964년 처음으로 이름도 새로운 맹호 백마 청룡 십자성 부대, 비둘기 백구 이동외과병원 등 소속 의원들이 집결됐다. 사격술을 비롯해 유격 공중 줄타기, 정글과 가상적군 동굴 수색, 지뢰밭 탐지 등 실전 훈련에 땀을 쏟았다. 한 달 훈련은 추운 겨울과 뜨거운 여름도 없었다.

이렇게 강군으로 새롭게 태어난 한국군은 험준한 배후령을 다시 넘어 춘천으로 향했다. 굽이치는 소양강, 우뚝 서 고향을 지키는 봉의산이 우리를 맞아 줬다. 춘천역에도 가족과 형제, 많은 시민이 태극기를 흔들며 우릴 맞았다. 우리는 곧 야간 경춘선 열차에 올랐고 경부선으로 이어 달리며 부산항 제3부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미군 수송선에 올랐다. 그리고 1주일 후 무더위의 월남땅 나트랑, 퀴논 송카우 투이호아 다낭항 등에 도착했다. 곧 새로운 부대 배치를 받았다. M16 소총과 정글화, 철모 방탄조끼 등을 지급받았다. 전쟁 한복판에 뛰어든 우리는 1964년부터 1973년 종전까지 8년8개월간 적과 대치했고 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평정사업도 펼쳤다. 종전까지 투입된 한국군은 모두 32만명, 희생자도 5,000여명에 이르렀다. 전상자는 1만1,000여명, 고엽제 피해 전우들도 다수 발생했다.

필자는 1968년 12월 나트랑항에 도착, 주월 한국군 야전사령부 군사정보부대 명령에 따라 사이공(호찌민) 외곽 월남군 어학전문기관에서 3개월 집중 교육을 받았다. 적지에 투입, 첩보 수집과 포로 신문 등 새로운 전투기능병으로 재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곧 월남중부 송카우의 맹호혜산진 부대로 급파됐다. 임무는 부대 외곽에서 암약하는 게릴라들을 색출, 소탕하는 것이었다.

매월 몇 차례 전투헬기를 탔고 적진 깊숙이 투입됐다. 적 위장복의 월남인들을 지원했고 무사 생환하는 그들을 재투입하는 최일선 첩보병이었다. 1년 뒤 귀국 예정이던 내가 2년으로 연장된 것은 이 같은 주요 업무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월남전 특수는 한국의 국력 신장과 국가 부흥에도 크게 이바지한 것이 아닌가 싶다. 1963년 한국 수출 총액이 1억 달러에 못 미쳤으나 월남전 특수에 힘입어 250배가 넘어선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필자는 '춘천 월남전 참전 기념탑을 건립하며' 비문을 쓰면서 우리의 더욱 굳은 결의를 밝혔다. 월남전에서 희생된 전우의 명복과 그 뜻을 결코 잊지 말 것과 대한민국 안보의 초석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 발전에도 기여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월남전참전자회를 이끌며 기념탑 건립 등에 헌신한 지도자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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