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너나 얼른 먹고 가!”
남편이 운동을 나간 사이, 밤샘에서 돌아온 딸애가 늦은 아침상을 놓고 새삼스럽게 아빠를 찾는다. 먼저 수저를 들어야 할 사람을 찾고 있는 거다. 이미 오래전에 '밥은 각자의 시간에 맞춰 먹는 것'으로 바뀌었기에 '무슨 의도일까?'슬쩍 딸애의 표정부터 살폈다.
궁금증을 풀어 볼 속셈으로 내가 '왜' 하고 물었지만 딸애의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추궁하듯 '왜'를 거듭 듣고야 마지못해 하는 말이 '그냥'이란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내 어린 날은, 아니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우리는 3대가 함께 살고 있었기에 숟가락 서열로 하루를 시작했었다. 당연히 그래 왔던 일이다. 하지만 복잡한 사회에 떠밀려 함께하는 식사는 기회를 잃었고 '숟가락 먼저 들기'같은 건 의식에서 사라졌다. 과거엔 당연했던 일이 오늘 아침엔 의심까지 품게 하는 것이다.
대구에서 50대 부부가 20~30대 젊은이들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부의 딸이 25분짜리 동영상을 1분으로 편집해 청와대에 청원을 내면서 갑론을박 세상이 시끄럽다. '누가 먼저 때렸나, 얼마나 과격했나'도 쟁점이지만 '젊은것들'에 분노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경제활동인구인 50대에게 '노부부'라 칭하는 인터넷 기사도 너덜너덜한 속셈이 있어 보인다.
우리 문화에선 나이가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게 사실이다. 아직도 통성명 후에는 나이를 밝혀야 호칭이 생기고 위아래로 중심축이 만들어져야 안정감이 생기지 않던가.
물론 더 오래된 과거에는 나이만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무조건 감수해야 했던 '아랫것'의 설움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닌 것 같다.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건 부모의 목소리일 뿐, 사회에선 동등한 인격체다. 경험의 가중치만큼 젊은 오너의 명석한 판단력을 기대하는 사회다. 재혼한 아내가 딸보다 어리다고 해 흠이 되지 않으며, 말단 사원이 최고경영자에게도 사과를 요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아닌 것은 '아니다' 단박에 거절하는 젊은이의 입장을 수용했다면 '미안하다'고 이해까지 구해야 종결되는 사회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90세에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는 어르신의 이야기가 TV에 나왔다. '우와!' 나는 탄성 한 번으로 어르신의 나이에 경의를 표했다. 아니 '나이'가 아닌 어르신의 품격에 존경을 표한다.
이 시대에 맞는 인격이란 것이 그런 게 아닐까. 장유유서를 버리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의식도 시대를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밥을 먹고 일어서는 딸아이에게 기어이 속을 보이고 말았다. '아빠한테 부탁할 게 있어?' 하자 아이가 싱긋이 웃었다. “밥을 같이 먹어야 친해진다면서요. 아빠 본 지 1주일도 넘은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