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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벤치마킹 좀 하면 어때?”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한 지자체 공무원은 단체장이 해외출장을 간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난다고 한다. 이번에는 또 뭘 보고 와서 벤치마킹하라며 엉뚱한 지시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간혹 선진적 사업이라는 호평을 받기도 하지만 대개 해당 지자체의 실정에 맞지 않아 실행 과정에서 잡음을 낳고 언론의 비판만 초래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6월 지방선거로 입성한 지자체장들이 취임 100일을 맞으며 여기저기서 의욕적인 정책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럴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벤치마킹이다. 국내외 선행 사례를 참고하는 게 허물일 리 없지만 그게 사안의 핵심을 흐리게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벤치마킹은 '선두주자와의 격차를 줄이려는 후발주자의 자기 혁신 전략'으로 시작됐다. 1970년대 전 세계 복사기 시장의 90% 이상을 독식하던 제록스가 캐논이라는 신생기업의 돌풍으로 시장점유율이 40%대로 떨어지자 캐논의 급성장 비결을 분석해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고 시장점유율을 회복한 데서 시작된 경영기법이다. GE사가 이걸 따라 도입하면서 전 세계로 확산이 됐다.

그런데 벤치마킹은 글자 그대로 따라잡기 전략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라는 2등의 전략이다. 우리 경제는 그간 이런 전략으로 글로벌 1등과 맞붙어 싸우며 힘을 키워 왔다. 스마트폰 자동차 반도체 조선 철강 등이 다 그렇다. 그런 효자산업들이 중국이나 다른 신흥 2등들의 추격에 덜미를 잡혀 하나하나 무너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라'고 한다. 1등 전략으로 갈아 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한 국가전략으로 지난 정부에서는 창조경제를, 현 정부에서는 혁신성장을 내걸었지만 '1등 따라하기'에만 젖은 사람들은 싸늘한 냉소를 보낼 뿐이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다시 벤치마킹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든다. 2등 전략으로 1등 전략을 세워 보겠다는 지독한 역설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4차 산업혁명이다. 언제부턴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4차산업 혁명'으로, 네 번째 찾아온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라 '4차산업'이라는 신종 산업이 주도한 혁명이라는 의미로 살짝 바꿔 쓰고 있다. 처음엔 띄어쓰기 혹은 띄어 읽기를 잘못한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그게 아니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청와대까지 난리법석인데 뭘 어떻게 하라는 얘긴지 감을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4차 산업' 리스트를 정리해 주면서 갑자기 일이 쉬워졌다. 복제하고 모방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드론 등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몇 가지 첨단산업을 찍어 예산을 쏟아부으면 되는 거다. 지금 전국에서 4차 산업 육성이라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벤치마킹은 과연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혁신의 방법일까? 혹시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는 어려운 숙제를 피하려 단물만 빨려는 것은 아닐까? 요즘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죽을 것 같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과거와 미래사이에서 집단적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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