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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일반

[강원포럼]박용만 선생의 한인소년병학교

김한택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필자는 2015년 8월에서 2016년 7월까지 미국 네브래스카주 링컨시에 위치한 네브래스카 링컨대학교 로스쿨에 연구교수로 파견된 바 있다. 그곳에 있을 때 철원 출신 독립운동가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 선생(1881~1928년)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가 링컨시에서 차로 약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헤이스팅스라는 도시에 소재한 헤이스팅스대학 내에 있었고, 박용만 선생의 추모비가 그 대학에 세워졌다고 해서 방문한 적이 있다. 추모비는 2002년 7월 한국 정부(총영사관)와 네브래스카 주 한인회가 공동으로 건립한 것인데, 추모비 상단에 한국과 미국 두 국기와 한국어, 영어 두 언어로 된 추모글이 새겨져 있었다.

미주 한인들은 이승만, 안창호 선생과 함께 3대 지도자로 박용만 선생을 꼽는다. 선생은 1881년 철원에서 태어나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네브래스카주 링컨시에 있는 링컨고등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06년 헤이스팅스대학에 입학했다. 190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편입해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학군사관후보생(ROTC) 과정도 이수했다. 1908년 12월 선생은 무장투쟁만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장소로 링컨시에서 서쪽으로 차로 2시간 정도에 위치한 카니시 한 농장에 부지를 마련했다. 그는 생도들이 기숙하면서 훈련할 수 있는 군사학교 설립을 준비하면서 미국 정부와 네브래스카주정부의 인가를 얻어 훈련 시 사용할 무기로 미군들이 사용했던 총을 구입했고, 마침내 1909년 6월 미국 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가 창립됐다. 그 후 선생은 헤이스팅스대학 측과 교섭해 1910년 4월 한인소년병학교를 헤이스팅스대학 구내로 이전했는데, 이 한인소년병학교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한인무관학교인 것이다.

이 학교는 1914년 일본 영사관의 압력으로 폐교될 때까지 존속했었다. 학생들은 여름방학에 입소해 평균 8주간 훈련을 받는 하계군사학교체제로 운영됐고, 현재의 ROTC처럼 학기 중 각자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일종의 독립군장교양성소라고 할 수 있다. 이 학교의 개설로 인해 미주교포들의 장기적인 독립운동 방향이 설정됐다. 또한 상당수의 재미 한인사회 중견 지도자가 배출됐다. 1914년 학교가 폐교됐지만 그 해 6월 박용만 선생은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를 다시 하와이에 창설했다.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현 외교부장관)으로 추대됐지만 이를 거절하고 1920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신채호 등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결성,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는 1928년 군자금 모금차 중국에 체류하던 중 독립운동에 쓸 돈을 내놓으라는 의열단원의 요구에 불응하자 의열단원이 쏜 총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데, 한국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3·1절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철원 출신 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의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투쟁정신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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