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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확대경 ]허균과 인문도시 강릉

정항교 전 오죽헌시립박물관장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만권의 서책 중에 좀벌레가 돼 책 읽는 즐거움으로 노후를 즐길 수 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 한가!” 허균이 우리나라 최초 사설 도서관 격인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을 완성하고 쓴 기문의 일부다.

1602년 유인길 강릉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친구 허균에게 공납하고 남은 명삼을 주자 허균은 사사로이 쓸 수 없고 고을 선비들과 같이 써야 한다며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에게 부탁해 귀중한 서적을 구입해 오도록 했다. 당시 만권이나 되는 전적을 고향으로 보내 경포 호반에 있던 누각 하나를 비우고 이 서책을 소장케 한 다음 고을 선비 누구에게나 빌려 읽도록 했다. 도서관 역할은 세종 때 집현전에 장서각이 있었고, 세조 때는 홍문관에 등영각이 있어 도서를 수장했지만 한정된 중앙관원에게만 현장에서 열람이 가능했다. 호서장서각은 허난설헌 고택으로 전하는 인근으로만 추정할 뿐 그 터는 확실치 않으나 우리나라 사설 도서관의 시초이자 인문도시 강릉을 낳게 한 빌미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고전 하면 케케묵은 낡은 사상을 담은 책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고전은 초기 세계 주요 문명사에 쓰인 사상서이자 인문학의 창시물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인간의 참된 가치 실현을 위해 옛것을 더듬어 새로운 것을 알고자 얼음에 박을 밀 듯 고전을 읽었다. 인문학은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을 멀리하면 지적 자극이 없어지고 문화시민으로 성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문학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강릉은 우리나라 문학, 역사, 철학, 예술 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들의 삶과 이들이 남긴 다부진 문화유산이 살아 숨 쉬는 고장이다. 이 같은 역사문화 자산의 소유권자는 바로 강릉시민이다. 때맞춰 인문학 사회적 기여도를 높이기 위해 강릉인문도시사업단이 강릉원주대에 자리를 틀고 지역민의 인문학 역량 강화에 앞장서고 있다.

대학에는 평생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개설돼 질 높고 다양한 인문학 강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교육 기능을 갖춘 사회적 교육기관도 다퉈 인문학 강좌에 뛰어들고 있다. 지향하는 목표 또한 뚜렷하다. 자율주행차가 거리를 누비고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들이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미래와 현재가 서로 뒤엉켜 있는 시대에 인문학을 통해 인간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주안을 두고 있다.

책의 도시, 도서관의 도시가 강릉 인문브랜드 원석이라면 앞으로 가공해 다듬기에 따라 값을 논하기 어려운 보석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최초 사설 도서관을 복원하면 인문도시 강릉의 상징이 될 수 있으니 “호서장서각을 복원해 허균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자”라는 어느 대학 교수의 주장은 강릉인문브랜드 원석 가공의 첫 보물이 될 수 있다.

앞으로 강릉문화원이 대학과 연계, 인문학 열풍을 불러일으킨다면 문화에 깃든 인문정신을 일상 속에서 향유하고 시민 삶을 견인하는 또 하나의 촉매가 될 것이다. 허균 탄생 450주년을 맞아 미래를 내다본 혜안에 절로 옷깃이 여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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