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모바일 구독자 240만
  • 총선
  • 총선
  • 총선
  • 총선
기고

[법정에서 만난 세상]현명함을 꿈꾸며

강수정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부장판사

법원에 몸담고 재판을 한 지 벌써 18년째가 됐다.

법원에서 받는 가장 뼈아픈 비판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특정한 교육 시스템 안에서 양성된 법조인들만의 논리와 관점으로 국민의 눈높이와는 다른 재판을 한다'는 것이다. 형평에 맞지 않거나 일반 국민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 선고됐다는 기사가 나올 때면 '차라리 AI 판사가 낫겠다'는 비판이 나온다. 매번 산처럼 쌓인 사건들을 묵묵히 야근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판결하는 나와 동료법관들은 그때마다 몹시 억울하다는 심정이 든다. 하지만 그만큼 재판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국민이 많은 것이다.

초임판사 시절, 나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니, 10년이 지나면 조금은 더 현명한 재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현명한 재판이라고 한다면 법정에서 당사자들에게 적절하게 의견 진술 기회를 부여하고, 그 진술에 귀 기울이며, 법정을 나서는 당사자들에게 절차적인 예측 가능성과 만족감을 느끼게 하며, 선고한 판결을 받아 보고 설령 자신에게 불리한 결론이더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재판이었다. 하지만 벌써 18년을 판사로 근무한 지금, 법정에 들어서는 나는 현명한 재판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느낀다.

한 명의 판사가 처리해야 하는 사건은 수백 건이 넘고, 접수되는 소송사건을 늦춰짐 없이 처리하려면 하루에도 수십 건을 재판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한 사건에 5분 이상을 들여 재판을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재판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고, 재판을 하는 판사 입장에서도 한마디라도 더 묻고 더 설명하고 싶다. 그렇지만 시간이 부족하고, 나머지 사건들은 대기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재판이 이게 다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법정을 나서는 당사자가 많을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30분씩만 재판할 수 있으면 좀 더 만족스럽지 않을까 하는 비현실적인 생각도 해 본다.

법정을 나와 판사실에서 당사자들이 써낸 서면을 읽고 또 읽는다. 법정에서 미처 듣지 못했던 목소리들을 서면에서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행간에 숨어 있는 어려움들을 AI 법관보다는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을 이해해 달라고 읍소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어진 여건하에서 가능하나마 현명한 재판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마음속으로 끙끙대며 고민해 본다. 어떤 결론을 내는 것이 현명한 판결일지 판결을 써놓고도 몇 번씩 고민한다. 그러다 보니 재판은 하면 할수록 더 어렵게만 느껴진다.

강릉지원에서 가까운 곳에 '김시습 기념관'이 있다. 김시습 기념관에 가서 매월당 김시습의 시 '나의 삶'을 읽었다. '백 년 뒤 나의 무덤에 비석을 세울 때, 꿈속에 살다 죽은 늙은이라 써준다면, 거의 내 마음을 알았다 할 것이니, 천년 뒤에 이 내 회포 알아나 주었으면…'

김시습은 평생 이상을 꿈꿨으나 그것을 현실 정치에 실행하지는 못했던 회한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나는 다른 의미에서 나의 비석에 꿈속에 살다 죽은 늙은이라 써주기를 바라 본다. 양쪽 당사자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현명한 재판을 할 수 있기를 꿈꿨던, 그래서 법정을 나서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억울해하기를 꿈꿨던,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