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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일반

[금요칼럼]공정으로서의 정의

박찬일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인

'절차적 공정이 먼저 가고, 결과적 정의가 그 뒤를 따른다'고 했을 때 이것은 정의(존 롤스 '정의론')에 관해서이고, 무엇보다도 '존재하는 불평등'의 해소에 관한 것이다. 롤스의 '절차적 공정'은 이를테면 정해진 파이가 있을 때(정확히 말하면 파이가 정해져 있고 이 파이를 둘이 나눠 가져야 할 때), 이것을 나누는 사람과 나눈 것을 '먼저' 선택하는 사람을 각각 다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나누는 사람은 자기가 가져가야 할 것이 어느 것이 될지 모르므로(이른바 '무지의 베일') 나누는 사람은 최대한 공정하게, '동일한 배분'이라는 룰에 최대한 가깝게 나누려고 할 것이다.

공정한 사회가 먼저 가고, 즉 특권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가 먼저 가고, 정의(?)가 지배적인 사회가 그 뒤를 따른다. 절차적 공정이 기회적 균등의 다른 말이 되는 까닭이고, 결과적으로 (절차적 공정이) 불평등 해소론(論)이 되는 까닭이다. 물론 절차적 공정에 의한 불평등 해소론(論)이 '당장'의 불평등 해소를 말하지 않는다. 기왕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일시에 똑바로 잡는 것은 혁명(혹은 국가 붕괴)에 의한 것이지, 절차적 공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롤스의 '정의론'이 말하는 절차적 공정에 의한 불평등 해소는 낙관적 전망에 의한 불평등 해소다.

'21세기 자본'(2013년)에서 아주 강력한 누진소득세 및 누진소유세를 말한 적이 있는 토마 피케티(파리경제대)는 최근의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년)에서 보편적 기본소득(UBI)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25세 청년들에게 프랑스 국민들 자산의 평균 60%에 해당하는 자산(기본자산·대략 1억6,000만원)을 일률적으로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발터 샤이델(스탠퍼드대)은 '불평등의 역사(원제: The Great Leveler, 2017년)'에서 인위적 행위에 의한 불평등 해소가 아닌, '자연적' 불평등 해소론(論)을 개진한다. 샤이델 교수는 그동안의 불평등 해소에 '넷의 흑기사', 즉 전쟁-혁명-국가 붕괴-전염병들이 주된, 그리고 주기적 역할을 해 온 점을 강조했다.

절차적 공정과 결과적 정의를 합해서 말한 것이 '절차적 정의'다. 롤스의 말로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다. 무지의 베일에 의한 것으로서 '공정한 절차'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점, 이것이 롤스 정의론의 핵심이다. 공정한 절차가 정의를 담보한다. 절차적 정의, 곧 공정한 절차의 강조는 법과 제도의 준수를 포함하고, 무엇보다도 '공정한 절차의 강조=법과 제도의 준수'는 가장 혜택받지 못한 계층을 위한 법과 제도의 준수를 포함한다. 공정한 절차, 혹은 절차적 정의의 혜택은 가장 혜택받지 못한 계층에게 '가장 많이' 주어진다.

절차적 공정은 가장 혜택받지 못한 계층을 위한 것이다. 절차적 공정으로 요약되는 롤스의 정의론이 형이상학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고, 무엇보다 정언명령이 되는 까닭이다. 롤스의 정의론은 칸트의 정언명령,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으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라는 '요청의 형이상학'과 상호유비적이다. 절차적 공정(公正)에 의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진정한 의미의 (이의 제기에서 자유로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절차적 정의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행복을 부인하는 것을 또한 부인한다. 요체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이고,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최종적으로 달성하게 될 '이의 없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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