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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춘추칼럼]조간신문을 읽는 즐거움

장석주 시인

저 건너 숲에서 들려오는 아침의 소리는 파이프오르간 반주에 맞춘 합창 소리 같다. 오늘 아침엔 숲 아래로 교회 첨탑이 보이고, 숲 위로 회색 구름 몇 장이 걸려 있을 뿐이다. 식탁에는 막 구운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방금 씻어 껍질째 사등분한 사과 한 알, 그리고 조간신문. 나는 아침마다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조간신문을 펼친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가를 말해다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말하겠노라.

부지런한 신문배달원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신문이 현관 앞에 떨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새벽의 이 경쾌한 소리가 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식탁 위에 펼친 조간신문엔 나라 안 흉악 범죄에서 먼 나라의 지진이나 홍수 피해, 피로 얼룩진 내전과 테러 소식이 난무한다. 세상의 죄악과 음습한 소식으로 소란스러운 조간신문은 아침 식탁의 고요함과 극단적으로 부조화를 이룬다. 우리는 종종 이 부조화의 간극에서 기묘한 느낌에 빠진다.

나는 중학교 입학 무렵부터 조간신문을 읽었다. 그 시절엔 신문을 구독하는 집이 많았다. 마당에 떨어진 조간신문을 주워들고 와 읽는 기쁨은 각별했다. 조간신문에서 연재소설을 읽고, 1968년 달 탐사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소식을 접했다. 인류 중 최초로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이 남긴 “한 인간에겐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란 말은 내 심장을 얼마나 빨리 뛰게 했던가! 나는 조간신문을 통해 세상 견문을 넓혔다. 지금 읽는 한자도 조간신문을 읽으며 익힌 것이다. 그 무렵 조간신문에서 한 지방신문에서 ‘3·1문예상' 공모 단신을 찾아내고 시와 산문을 써서 보냈다. 얼마 뒤 놀랍게도 두 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전보로 받았다. 나는 D시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순은 메달을 두 개나 목에 거는 기쁨을 누렸다.

아침 식탁은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고요와 평화를 유지한다. 이 정금 같은 고요와 가장 완벽한 평화 속에서 읽는 조간신문이란 무엇인가? 조간신문은 일기예보, 노동자 파업, 주가 변동, 나라 밖 지진이나 화산 폭발 소식을 전하며 하루의 세계를 축약한다.

오늘의 세계를 구석구석 살피고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비동일화의 시간이 스미고 섞이며 만드는 세계가 복잡계인 까닭이다. 어제 그제 더 옛날의 것들은 순차적으로 ‘역사'라는 화석으로 변하지만 오늘은 수많은 내일들의 어머니다. 오늘을 알고, 그 앎을 바탕으로 내일을 예측하는 일은 쉽지 않은데, 조간신문이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한다. 조간신문은 혼동과 판단 정지와 흐름들을 거슬러 오늘이라는 기적이 홀연히 나타남을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종이신문의 시대가 가고 있다고 한다. 종이신문은 ‘느린 매체'로 속보 경쟁에서 디지털 매체를 이길 수가 없다. 많은 이가 조간신문 대신에 인터넷에 접속해 세상과 만나는 게 오늘의 흐름이다. 하지만 나는 아침 식탁에서 조간신문을 펼쳐 읽는 세상에 살고 싶다. 독수리처럼 높이 떠서 멀리 보고, 그늘진 곳을 두루 살피며, 약하고 어린 것에겐 관대하고 힘세고 뻣뻣한 것에겐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눌리고 멍든 것을 보듬고 위로하는 조간신문이 나오는 세상을 나는 여전히 꿈꾼다. 우리가 아침 식탁에서 맛있는 빵처럼 떼어 먹으며 누리는 조간신문을 읽는 즐거움과 보람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더 삭막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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