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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

[언중언]'기억나지 않는다'

'시치미를 떼다(알고도 짐짓 모르는 체하다)'는 매사냥에서 유래한 말이다. 매를 이용한 사냥은 4,000년 전부터 고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졌다. 하지만 매를 잃거나 훔치는 일도 잦아졌다. 꼬리털 속에 매의 특징과 소유주의 이름 등을 새겨 넣은 명패인 시치미를 달기 시작했다. 동물의 뼈나 쇠뿔을 깎아 만든 시치미를 달아 놓는 건 매를 주인에게 돌려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떼고 제 것이라고 우기는 일이 늘어나면서 '시치미를 뗀다'는 말이 나왔다. ▼청문회나 대형 정치적 사건,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면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입을 열면….” 장세동, 이원조, 장영자, 권노갑씨 등이 비슷한 말을 했다. 1997년 국회 한보특위 청문회. 당시 수감 중이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마스크를 쓰고 출석했다. 한보 특혜 의혹과 관련해 세상을 흔든 '정태수 리스트'에 대한 의원들의 추궁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당시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학습효과일까. 노무현 정부가 2007년 11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표결에 앞서 북한에 의견을 물어봤다는 '송민순 회고록'을 놓고 진실 공방이 뜨거웠던 2016년 핵심 당사자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지난 27일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북한에 30억 달러를 지원한다'는 비공개 합의서에 서명했다는 의혹과 관련, “기억이 없다”고 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국회 국정조사나 청문회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증인이나 청문 대상자가 추궁을 피하거나 시치미를 뗄 때 쓰는 화법이다. 물론 정말 기억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알면서도 숨기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 기억하고 싶은 것만 저장하는 편리한 기억창고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이 때문일까. 지금은 많은 국민이 정치인의 기억보다 기록을 더 신뢰한다.

박종홍논설위원·pjh@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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