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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

[언중언]초대 대법원장의 유산

1948년 창설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친일반민족 행위자 처벌의 선봉에 섰다. 사무실을 차리자마자 사흘 만에 친일기업인 박흥식을 체포하는 등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친일반민족 행위자가 정권 유지의 핵심 역할을 하던 터라 박해를 받았고, 무력화 시도에 상처를 입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이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담화를 발표했지만, 김병로 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이 불법이 아니라는 담화로 맞섰다. ▼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인 김병로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꼭 72년 전인 1948년 8월5일 국회로부터 초대 대법원장 인준을 받았다. 구한말 3대 민족 인권 변호사 중 한 명인 그의 대법원장 인준은 대한민국 근간인 삼권분립의 틀이 완성된 순간이기도 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임명에 부정적이었지만, 결국 대법원장에 이어 법전편찬위원장까지 꿰차는 행보를 이어 갔다. ▼반민특위는 설립 이듬해인 1949년 6월6일 6·6 습격사건으로 순식간에 힘을 잃게 된다.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사법기관에서는 추호도 용서 없이 법대로 판단할 것”이라며 해결 의지를 보였지만 석연찮은 이유에 의한 해산을 막진 못했다. ▼그는 정권과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사표 요구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고 응수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사건에는 “국민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다.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사법부 독립뿐”이라고 일갈했다. 마지막 기자회견에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이 없고, 발 뻗고 잘 방 한 칸 없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국록을 받은 사람은 불평하거나 돈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왔소” 라고 메시지를 전한다. 사법부 독립, 사법개혁 등 구호가 난무하는 그 중심에서 곱씹어 봐야 할 상식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좌우와 높고 낮음에 휘둘리지 않는 오롯이 헌법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 정의가 탄탄해지는 기틀이다.

허남윤 부장·paul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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