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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강원나무기행]'길흉화복' 점지 1천년 터줏대감

(3) 삼척 궁촌리 음나무

높이 17.5m 밑동 둘레 6.4m 천연기념물 제363호 지정 보호

고려 공양왕 흔적 아직도 남아 있어…음나무 당산목은 희소

매년 정월·단옷날이면 제사 올려…마을주민들의 '수호신'

나뭇잎 돋을 때 먼저 피는 방향으로 영동·영서 '풍년' 점쳐

■천년의 시간이 흐르다=삼척 근덕면 궁촌리는 고려 공양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서 있는 마을이다. 이곳엔 오랜 터줏대감처럼 서 있는 개두릅나무(음나무)가 있다. 1,000년 이상 궁촌리를 지켜온 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63호로 지정돼 있다. 음나무는 마을의 상징으로 아직도 제삿밥을 받고 있다. 일반 마을의 당산목은 느티나무가 많지만 궁촌리처럼 음나무가 당산목으로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마을 주민들은 나무를 해치면 피해를 입는다 하여 신성시하고 마을 주민들의 수호신으로 여기며 매년 정월과 단옷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다.

설날이면 100여 가구의 궁촌리 주민들은 삼색 과일과 어물, 떡, 메(밥)를 정성껏 차려서 머리에 이고 당산목 주변으로 모여들어 각자 마련한 제사 음식을 돌담 아래에 도착한 순서대로 차려 놓고 제를 지낸다. 먼저 마을 무당이 부정굿으로 음나무 주변을 정화한 다음에 치성을 드렸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삼척시에서 제물을 마련해 제사를 지낸 후 부터는 이런 모습이 사라졌다. 강릉단오제가 전국구 단오행사라면 이곳의 단오는 소박하다. 무녀와 악사는 하루 종일 마을 주민들의 소원을 악기와 입담으로 쉬지 않고 나무에게 전한다.

제사는 주민들에게 축제다. 통돼지가 재단 위에 올려지고 무녀 손에 대나무가 들려 있다. 한참 축원을 한 뒤 대나무 끝가지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례에 참가한 주민들은 일제히 일어나 흔들리는 가지를 향해 절을 한다. 신이 나무에 안착했나 보다. 제례는 마을 주민 한 분 한 분 고민 상담을 한 후 3시간 정도 걸렸다. 제단에 올렸던 음식들이 마을 주민상으로 옮겨졌다. 민속학을 연구하던 교수도, 학생도, 마을 주민도 함께 둘러앉아 신 내린 음식을 먹는다. 단옷날에는 제사를 지낸 후 그네뛰기, 널뛰기, 농악놀이 등 단오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요즘은 혼자 놀이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많아 제사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아지니 아쉬울 뿐이다.

나뭇잎이 돋아날 때 동쪽 가지가 먼저 나면 영동지방에, 북서쪽 가지의 잎이 먼저 피면 영서지방에 풍년이 든다는 음나무의 숨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나무는 높이 17.5m, 가슴 높이 둘레 5.5m, 밑동 둘레는 6.4m다. 줄기는 지상 3m 부근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작은 가지는 고사돼 버섯이 나는 등 상태가 나빠 보이고, 죽은 나뭇가지를 잘라내 모양이 크게 나빠졌다. 음나무 주변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와 향나무가 있으나 음나무가 워낙 크다 보니 작게 보인다. 향나무가 있는 것으로 봐서 옛 집터로 보이는데, 이 집터에서 고려 공양왕이 유배생활을 했다고 마을 주민들은 전한다. 아마도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유배됐던 곳이 이곳이라면 이 나무의 순을 따서 요리해 드셨을 정도로 나무의 나이가 많다.

■백성들의 삶을 나누며 살다=이 나무를 부르는 이름은 음나무, 엄나무, 개두릅나무, 깨두릅나무, 덩엄나무, 당음나무, 멍구나무, 엉개나무 등 많다. 그만큼 쓰임새가 많다는 뜻이다.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개두릅(강릉, 고성, 동해, 삼척, 양양, 원주, 인제, 정선, 태백, 평창), 개두릅나무(정선, 평창, 홍천), 개두릅순(양양), 엄나무(강릉, 속초, 양구, 양양, 원주, 인제, 정선, 춘천, 태백, 평창, 홍천, 횡성), 엄나무순(평창, 횡성), 엄두릅(원주), 음나무(강릉, 삼척, 양구, 영월, 인제, 철원, 평창, 화천, 횡성) 등으로 불린다. 쌉쌀한 쓴맛은 봄날 입맛을 돋우는 데 제격이다.

음식문화 중에 나무를 끓여 먹는 민족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특히 우리 민족은 국물을 만들어내 먹는 다양한 형태의 식문화가 있다. 음나무는 오리, 닭을 재료로 먹는 보양식 국물을 맛깔나게 하는 주재료다. 음나무가 빠지면 보양식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먹는 방법은 봄에 어린 순을 삶아서 나물로 먹거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튀김, 전, 장아찌, 김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잎은 관절, 당뇨, 통증완화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나무줄기는 농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음나무는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도 갖고 있다. 시골마을을 돌아다녀 보면 집 마당에 가시가 뾰족한 나무가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나쁜 액운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음나무에게 보초를 서게 하는 것이다. 뾰족한 가시는 보기만 해도 가슴을 움찔하게 하는 위력을 지녔다. 집 주변 담장에 심어 집 안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들을 물리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방과 방 사이, 천장과 부뚜막에도 나무토막을 걸어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예전에는 귀신도 많아서 부엌, 화장실, 헛간 등 사람들의 손을 거친 모든 곳엔 귀신이 있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말하던 귀신들이 지금은 없다. 초롱불, 호야불로 주변을 밝히던 세상이 너도나도 전깃불을 밝히자 세상이 환해졌다. 밝은 세상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없애고 현실 세계에 안주하게 만들었다. 낮처럼 밝은 밤 세상은 그 많던 귀신을 몽상의 세계에서 쫓아냈다. 눈물과 설렘 그리고 해악과 지혜를 주던 귀신들은 스마트한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삼척=김남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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