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원 교암산 무자비한 포격에
6중대 100여명 필사의 사수
수천명 중공군 하루 6번 막아
살아돌아온 자는 6명뿐
주인 12번이나 바뀐 백마고지
강승우·오규봉·안영권
자폭해 적 기관총 진지 뚫어
이국에서 전사한 佛 장교도
작년까지 3,529위 유해 발굴
1953년 7월13일 오전 7시 철원 교암산을 향한 중공군의 무자비한 포격이 시작됐다. 정상 아래를 지키던 국군 6사단 6중대는 포격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진지에 고립됐다.
하지만 6중대장 김교수 대위와 100여명의 대원들은 포격후 들이닥친 수천명의 중공군을 하루에 6번이나 막아냈다. 독이 오른 중공군은 14일 총공세를 감행했고 마지막임을 직감한 김 대위는 국군 포병대에 자신의 진지로 일제사격을 요청하고 진지에서 전사했다.
중대장의 희생을 목격한 중대원들은 필사의 전투를 벌여 8시간 동안 진지를 사수했다. 그들이 지킨 8시간 동안 함께 공격을 받던 인근 국군부대는 무사히 후퇴해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100명이 넘는 6중대원 중 살아 돌아온 자는 6명뿐이었다.
6중대가 자신들의 목숨으로 아군이 안전하게 후퇴할 시간을 벌고 있는 동안 인근 2중대는 특공대를 조직했다. 2중대 분대장이던 안낙규 중사와 8명의 특공대는 적의 진지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탄약 운반차량을 폭파하고 혼란을 일으킨 후 적진 한복판에서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재정비를 마친 국군은 반격을 통해 결국 이들이 사수했던 교암산을 되찾아 피맺힌 한을 풀어줬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 10월 정부는 김교수 대위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현재 우리나라 최북단 기차역인 철원 월정리역엔 6중대원들을 기리는 공적비가 남아있다. 1954년엔 안낙규 중사에게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다.
6·25 단일전투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평가받는 철원 백마고지엔 3군신(軍神)의 희생이 전해져온다. 1952년 10월6일 철원평야를 얻기 위해 중공군 4만4,000여명이 백마고지 총공격에 나섰다.
열흘간 우리나라 전쟁 역사상 가장 많은 27만 발의 포탄이 고지에 떨어지고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백마고지 전투의 시작이었다. 10번의 전투 중 고지를 빼앗긴 국군은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기관총 진지를 뚫지못해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22세의 소대장이었던 강승우 소위는 오규봉, 안영권 하사와 함께 TNT폭탄을 몸에 묶고 수류탄을 든 채 기관총 진지로 뛰어들어 자폭해 혈로를 뚫었다. 백마고지 3군신의 희생으로 비옥한 철원평야는 영원히 우리 영토가 됐고 육군 9사단 백마부대는 부대 내에 3군신상을 만들어 매일 헌화하고 있다.
머나먼 이국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나라 건국이념인 박애주의를 실현하다 산화한 프랑스 장교도 있었다.
1950년 11월 참전한 쥴 장루이 소령은 원주전투 등에서 의무대장으로 활약했고 1951년엔 홍천군 두촌면에 주둔하며 전쟁으로 쇠약해진 주민들의 치료에 나섰다. 그는 1951년 5월 지뢰를 밟은 국군 2명을 위해 지뢰지대에 뛰어들어 응급처치를 마친 후 자신도 지뢰를 밟아 산화했다. 홍천군은 1986년 그가 숨진 전사지인 두촌면 장남리에 동상을 건립하고 매년 추념식을 연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따르면 2000년 전국의 격전지에 대한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된 이후 지난해까지 도내에서만 3,529위의 유해가 나왔다. 전국에서 발굴된 유해 6,996위의 절반에 달한다. 3년1개월간의 6·25전쟁 기간 도내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아직도 수많은 전쟁영웅은 차가운 땅속에 잠든 채 다시 자유로운 대한민국의 빛을 볼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최기영기자 answer07@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