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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이 우리 사회의 고질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미투 운동이 일어나고서 드러난 그 실상에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 등 각계각층의 사회 전반에서 자행된 성도착적 불륜, 부도덕 불법의 행태는 금수와 인간의 분별을 불가능하게 한다. 공분을 느끼게 하는 사건들이다.

누구는 그 원인을 유학의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남녀 불평등의 유습에서 찾을 것이다. 거기에 `일말의 원인'도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운동을 지난해부터 본격화한 미국은 언제 유학의 가치관으로 관습화한 적이 있었던 나라냐는 반론이 성립함을 떠올리면 유학의 유습만으로 돌릴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대한 제어의 장치, 특히 윤리와 법제적 가치관의 작동에 그 주된 원인이 있다.

남녀 차별이 관습화됐던 조선시대에도 `인간다움', `바람직한 인간으로 되기'라는 윤리 차원에서는 여성을 남성이 보호하려 노력한 자취가 많았다. 당시 여성은 가정 밖의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으므로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대함이 고작이었지만, 그런 상태에서나마 남편은 아내를 마구 대하지 못하도록 했다. 예서(禮書)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를 `손님 대하듯 존중하라' 했다. 그로 해서 율곡 같은 학자는 `부부유별(夫婦有別)'의 해석을 `부부가 서로 공경해야 함'이라 했다. 이는 지금도 지켜져야 할 덕목이다. 그 조목을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가 땅인 만큼 서로 분별해야 함을 의미하는 구절이라고 한 것은 본의에서 어긋한 오해다.

누구는 또 `남녀칠세부동석'을 들지 모르겠다. 그 또한 남녀 차별에서 한 언구가 아니다. 불륜에 너무 일찍 눈뜨지 않도록, 나아가 남자에 의한 불륜 범함이 없도록 하는 예방조치에 근본 의도가 깃든 명제였다. 물론 구습 병폐의 제거, 시대에 따른 개혁에는 언제나 주저하지 말아야 하고 과감해야 한다. 권력의 유무 관계에서도 남녀평등은 철저히 실현돼야 마땅하다. 하지만 일정한 사상에 담긴 윤리의 보편적 정신에는 언제나 쓸모가 없지 않음에도 유의해야 한다.

문제는 윤리와 법제의 괴리에 있다. 남녀평등이 윤리와 법제가 일체로 뒷받침할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과 실현'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미투 운동에서 드러난 실상에는 성추행·성폭행의 범법자들이 상대 여인에게 누이동생이니, 딸이니, 심지어 손녀 같다는 감언을 가식해 유혹했다. 하지만 누이 딸 손녀 같은 혈육을 어느 윤리와 법제에서 추행 또는 폭행하도록 허용했던가? 구습의 본거라 할 유학에서도 그것들은 철퇴를 내릴 중죄의 금기사항이었다.

자기 영향권 아래 무력한 처지로 있는 사람에게는 해악의 짓은커녕 `배려와 호위'를 더 해주라는 것이 유학과 불교, 기독교 등의 윤리다. 그런 배려와 호위가 피차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바람직한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황폐된 윤리교육, 특히 `현재의 인성교육'이 사회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나랏일에 화급을 요하는 일이 산적했더라도 `윤리의식 강화에 의한 사회정화' 또한 급선무임을 알아야 한다. 인성교육의 철저화를 당로자(當路者)들에게 촉구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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