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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아는 58동 206칸 규모로 지어졌다. 화재를 대비해 관아 건물은 서로 닿지 않도록 건축됐고 담장을 쌓았다. 지금은 29동의 옛 건물과 시설물이 복원돼 있다. ▲매년 4~10월에 열리고 있는 수문장 교대 의식. ▲원도심인 칠성로 쇼핑거리에서 선보인 전통무예 장면. ▲다양한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동문재래시장 야시장 전경.(사진위쪽부터)

1434년 화재로 건물 모두 불타 소실
1999년 복원 작업 제주목 관아 부활
수문장 교대의식·전통무예 시연 비롯
동문 재래시장 탐방 등 관광객에 인기


제주성(城)은 조선시대(1392~1910년) 518년간 제주의 중심지였다. 성곽 길이는 3㎞에 이르렀고, 바다 방면을 제외해 동문·남문·서문 등 3개문이 있었다. 이 고도(古都)는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에서 다스렸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는 군사·행정·사법 등 전 분야를 지휘·감독했다. 이런 까닭에 제주목사의 동헌은 8도 관찰사가 머물던 감영과 마찬가지로 영청(營廳)이라 불렀다.

제주목사는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라는 군직을 겸임, 육·해군을 통솔했다.

조선시대 286명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가족을 데리고 오지 못하는 변방의 수령 임기는 2년6개월(900일)이지만 평균 재임기간은 1년10개월이었다. 아울러 연고가 있는 관직에 제수할 수 없게 한 상피제(相避制)를 엄격히 적용, 제주 출신은 제주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다.

제주목사 중에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한 반면, 폭정으로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약동(1470~1473년) 목사는 겨울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내면서 동상으로 죽고 다치는 백성이 나오자 신단을 아라동 산천단으로 옮겨 제를 봉행하도록 했다. 이임 시 관물과 관복 모두를 두고 떠나는 도중 말채찍을 손에 쥐고 있자 이마저도 관덕정에 기둥에 걸어 놓고 제주를 떠났다. 그는 말년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허명(1814~1815년) 목사는 채무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해지자 임시방편으로 차용문서를 만들어줬다. 더 나아가 이 문서를 태우고 무효를 선언해 민초들을 구원했다. 효력이 없는 문서가 `허명의 문서'로 불리는 이유다.

폭정을 일삼은 목사도 있었다. 1619년 부임한 양호는 탐학이 극도로 심해 여러 차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비호로 무마됐다.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벼슬에 쫓겨나도 제주에 남아 행패를 부리던 그는 1623년 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하자 체포돼 사형당했다.

역사 속 인물도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인조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은 1616년부터 3년간 제주목사로 재직한 바 있다. 16세기 중반 황해도에서 일어난 `임꺽정의 난'을 제압한 남치근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1552년 목사로 부임해 왜구를 무찔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은 1864년부터 2년간 목사로 재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홍종우는 1905년부터 1년간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혁명의 아이콘이었던 김옥균을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한 인물이다.

제주목 관아(국가사적 제380호)는 500년간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1434년(세종 16년) 대화재로 관아 건물이 모두 불타면서 소실됐다. 22대 목사인 최해산이 재건을 시작, 이듬해인 1435년 골격이 갖춰졌다. 조선시대 내내 증축과 개축이 이뤄졌다. 관아는 58동 206칸 규모로 지어졌다. 후일의 화재를 대비하기 위해 관아 건물은 서로 닿지 않도록 건축했고 담장을 쌓았다.

제주시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의 배치도가 확인되면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175억원을 들여 29동의 옛 건물과 시설물을 복원했다. 시민들은 기와 헌와(獻瓦) 운동을 벌여 복원에 필요한 기와 5만장 전량을 기부했다. 시민들의 정성으로 선조들의 혼과 숨결이 살아 있는 제주목 관아가 부활했다. 하지만 일제는 전국 해안과 내륙 등 요충지에 세워진 읍성(邑城)을 한민족의 단합된 힘과 항전의 상징으로 여겼다. 1910년 조선총독부의 1호 법률인 `조선읍성 훼철령'에 따라 읍성들은 철거돼 대부분 제 모습을 잃었다.

제주목 관아와 옛 제주성 일대는 광복을 지나 1980년대까지 제주도청·법원·검찰·경찰·세무서 등 관공서가 들어섰고, 은행·증권회사가 자리 잡은 제주 최대의 번화가였다. 그러나 관공서가 속속 이전했고, 2009년 중앙로에 있던 제주대학교병원마저 떠나면서 원도심의 화려했던 옛 영광은 석양에 기울고 있다.

원도심에 활기를 불어넣는 도시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다. 여기에 역사·문화 자원을 덧입히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제주목 관아에서는 수문장 교대 의식과 전통무예 시연이 펼쳐지고 있다. 올해는 4월부터 시행된다. 제주목 관아를 따라 칠성로 상점가에 이어 동쪽으로 중앙지하상가, 동문재래시장, 탐라문화광장을 탐방하는 코스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여파에도 야시장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희범 제주시장은 “일요일마다 제주목 관아 일대에서 다양한 문화예술 공연과 노천카페를 운영해 시민과 관광객들이 걷고 즐기는 공간으로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제주신보=좌동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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