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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정일주의 지면 갤러리]작가의 대표작 이해하고 싶다면 그의 인생을 들여다봐라

(1) 프롤로그

강원도 내 미술관 등 문화시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도민들에게 강원도 출신을 비롯한 유명 미술작가들의 작품을 지면으로나마 볼 수 있는 ‘지면갤러리'를 연재합니다. 미술전문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춘천 출신 정일주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이 글을 쓰는 이 ‘지면갤러리'는 작가들의 스토리와 그들의 사상 및 애환이 작품에 어떻게 녹아들어 갔는지 등을 쉽고 재미있게 펼쳐 보일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화제의 중심에선 한국 현대 미술시장

이건희 컬렉션·BTS 멤버의 SNS 등

대중의 문화향유 욕구 자극에 큰몫해

허나 유행편승만으로 현상 설명 안돼

무명의 작가 그림도 뜻밖의 감동전해

강원 출신 국민화가 박수근 특유양식

작가의 인생과 깊은 관계 보여주기도

어려웠던 미술에 가까워지며 길 열려

‘(문 등이) 열려 있는' 의미의 ‘Open'과 ‘달리다'라는 뜻의 ‘Run'의 합성어인 ‘오픈런'이 현대미술 전시와 아트페어에도 등장하고 있다. 샤넬, 롤렉스 등의 명품을 구매하기 위해 백화점 개점 시간을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는 현상이 최근 미술관에서도 펼쳐질 정도다.

미술이 이토록 화제의 중심에 선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적으로는 삼성그룹 고(故)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이 국가에 기증되면서 대중의 문화향유 욕구를 고취시켰고, 부동산이나 주식에 집중되던 재테크의 대상이 상대적으로 세금 부담과 투자 손실 리스크가 적다고 판단되는 미술로 이동했다. 또 신규 컬렉터로 급부상한 젊은 고액 자산가층의 구매력이 높아지고 있다.

국외적 요인으로는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로 꼽히던 홍콩이 정치적 이유로 주춤하고, 중국 베이징 미술시장의 폐쇄성이 두드러지는 것에 비해 한국은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이유도 있다. 뿐만 아니라 BTS 멤버 RM이 연신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작품을 SNS로 홍보한다. 이에 자극받은 MZ 세대들에게 미술은 ‘명품보다 더 폼 나고 멋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현대미술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려고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유행에 편승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온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다양한 작품 중 인상적이고 중요하며 논쟁적인 그림을 하나씩 살피다 보면, 미술이 선사하는 뜻밖의 기쁨과 놀라움, 지식과 정보의 성찬을 맛볼 수 있다. 그저 잘 팔리고 외국에서 주목받는 작품만이 아니라 명성과는 거리가 있는 화가의 작품일지라도 그에 얽힌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새삼 가슴 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연장선에서 이 연재를 진행한다. 작가를 만나고, 그 두툼한 생을 통해 그의 작품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한 시대의 속을 직시하게 된다. 더불어 삶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 한국현대미술을 주도한 작가들 중에는 강원도 출신도 여럿 포함돼 있다. 예컨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고 ‘국민화가'의 반열에 오른 박수근(朴壽根·1914~1965년)도 그중 한 명이다.

해방 이전 박수근은 주로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박수근 특유의 양식이 자리를 잡는다. 그는 전후(戰後) 서울 거리의 풍경과 서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대상으로 하되, 그중에서도 노동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시장, 길 위의 풍경으로 시대의 명암을 리얼하게 포착했다. 여기에 추임새를 더하는 것이 독자적인 기법이다. 박수근은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무시하고 평면적인 형식으로 그렸다. 또 화폭에 물감을 수차례 덧쌓아 화강암 같은 질감을 구축했다. 이 평면성과 ‘박수근표' 마티에르는 작품의 내용에 깊이를 부여한다.

한 작가의 생애와 대표작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 연결고리를 찾아가면, 어렵고 딱딱하게만 여겨졌던 미술이 조금씩 보이고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희미하나마 그 길을 열어보고자 한다.

작가는 막연하게, 화려하고 추상적인 세계를 사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치열한 현실이다. 한 점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자기 자신이나 현실과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만큼 작업 과정은 지난하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필자는 언젠가 “미술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다”는 아리송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오래도록 미술잡지 기자를 한 덕분에 “미술이 도대체 뭐냐?”, “작가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받게 된다. 상황 파악이나 발전 모색을 위한 물음 말고 용도와 쓰임, 쓸모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건데, 그때마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당황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신파조 노랫말이 생각났다. 물론 이것을 차용해 작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긴 쉽지 않지만 작품이 눈물의 씨앗이자 결실임은 분명하다. 미술을 좋아하고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 이름 날렸던 작가 가운데 몇 년째 은둔하는 이가 꽤 있다. 미술계에서 초대도 하지 않고 스스로도 나서지 않아 묵묵히 작업만 하는 어느 작가에게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잘 안 먹는다”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작가들은 어떤 쓰임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평범한 사고를 뒤집고 자신의 신념을 따를 뿐 다른 이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용하는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설령 밥 대신 눈물의 씨앗을 씹더라도 말이다. 작품의 기운이 만만찮은 것은 어쩌면 작가들이 자신의 생을 걸고 심혈을 기울인 에너지 때문일지 모른다. 그것이 눈물의 씨앗의 진실이 아닐까. 작품은 눈물의 결정체이고 사유의 씨앗이다. 작품 감상은 그 눈물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자문해 본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은 어떻게 탄생할까? 그 뒤에는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 그곳을 아득히 굽어본다.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 편집=신현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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