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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메트로폴리탄 뉴욕:핫플의 어제와 오늘]‘뮤지컬의 성지' 알고보니 미국 역사의 출발점이었네

(2) 뉴욕이 걸어온 길, 브로드웨이

뉴욕 초창기 네덜란드 지배 당시

거주인 영역 표시 위해 설치했던

북벽의 통로서 발단 기원설 유력

다운타운서 시작된 엔터테인먼트

그 확산의 주된 경로 브로드웨이

20세기 이후 연극 극장 등 밀집

뉴욕 맨해튼은 생전 처음 가보는 사람도 반나절만 걸어 돌아다니다 보면 대충은 길을 알 수 있을 만큼 길 찾기가 쉽다. 이건 맨해튼 거리가 바둑판처럼 가로(Street), 세로(Avenue) 격자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맨해튼 거리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남북 사선형으로 길게 뻗은 큰길 하나가 눈에 확 띈다. 이게 바로 브로드웨이(Broadway)다. 말 그대로 ‘넓은 길'이다. 처음 타임스퀘어 부근 뮤지컬 극장가에 가서 브로드웨이 표지판을 보고 ‘아, 여기가 뮤지컬로 유명한 그 브로드웨이로구나!' 하고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 타임스퀘어가 아니라 다운타운 다른 지역을 가도 또 브로드웨이가 나오는 게 아닌가! 나중에야 브로드웨이가 맨해튼의 수많은 거리중 그저 하나를 지칭하는 거리 이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타임스퀘어 뮤지컬 극장가엔 7번 애버뉴와 8번 애버뉴 사이에 샛길처럼 브로드웨이가 있지만,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5번 애버뉴와 6번 애버뉴 사이에, 더 아래로 내려가면 3번 애버뉴와 파크 애버뉴(맨해튼엔 4번 애버뉴가 없다) 사이에 브로드웨이가 있다. 즉, 브로드웨이는 맨해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사선으로 뻗친 대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낱 거리 이름인 브로드웨이가 뉴욕의 그 많은 뮤지컬 극장과 동일시되는 상징어처럼 된 것일까? 그건 짐작대로 뮤지컬 극장 대부분이 브로드웨이 주변에 밀집해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이 지금처럼 미드타운 타임스퀘어 부근에 밀집하게 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의 브로드웨이 극장들은 20세기 이후부터 하나둘 생겨난 것이고, 그 이전에는 맨해튼 남쪽 배터리파크 부근, 브로드웨이가 시작하는 지역(브로드웨이 1번지)에 화려한 극장, 식당, 상점들이 더 군집해 있었다. 즉, 뉴욕의 발전은 브로드웨이를 따라 아래로부터 위로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브로드웨이의 역사는 곧 뉴욕이 성장해 온 발자취라 할 만하다. 이에 잠시 브로드웨이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뉴욕을 이해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추적이 될 것 같다.

브로드웨이의 기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많은데, 가장 유력한 건 뉴욕 초창기 네덜란드 지배 당시 네덜란드 거주인들의 거주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다운타운 지역에 설치했던 북벽(Wall Street)의 한 통로(남쪽 거주지역과 북쪽 원주민 지역을 잇는)로 큰길을 하나 뚫었던 데서 발단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처음 명칭은 ‘The Principal Street, Principal Road'였는데 영국이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Broad Way, Broadway Street, Broadway'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맨해튼의 남쪽 끝 브로드웨이 1번지는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집무실로 썼던 ‘워싱턴 하우스(Washington House)'가 위치했던 자리로서 지금 미국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인 장소다.

뉴욕의 역사가 맨해튼 다운타운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만큼 연극이나 뮤지컬 등 엔터테인먼트 역시 다운타운에서 시작되어 점차 맨해튼 북쪽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다운타운 브로드웨이 부근에는 엔터테인먼트뿐 아니라 다양한 상업활동이 번성하였는데, 상업활동은 월스트리트 부근에서 계속 번창하여 지금의 금융 1번지, 월스트리트가 되었고 나머지 엔터테인먼트만 북상하였다고 한다. 그 확산의 주된 경로가 바로 브로드웨이였으며 지금처럼 미드타운 타임스퀘어 부근 브로드웨이에 뮤지컬, 연극 극장들이 밀집하게 된 건 20세기에 접어들고 나서부터였다.

뉴욕에서 최초로 공연된 연극은 1732년 파커(Farquhar)의 ‘The Recruiting Officer'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영국에서는 극장이 공연장 역할뿐 아니라 어떤 사회적인 이슈가 있을 때 사람들이 모여 데모하는, 일종의 사회운동의 집합소 같은 역할도 하고 있었다. 미국도 이 같은 흐름을 받아들여 극장이 단순히 예술공연만 하는 장소는 아니었다고 한다. 1776년 미국 워싱턴 연합군이 할렘(Harlem Height) 전투에서 영국을 이겼을 때 제일 먼저 발표한 칙령 중 하나도 극장(John Street Theater)을 다시 개관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브로드웨이 극장은 시민들의 자유 정신이 표출되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1798년 지금의 다운타운 브로드웨이 부근에 있었던 극장, ‘The Park Theater'의 경우만 해도 객석 수가 2,400개, 소공연 박스가 42개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 브로드웨이 극장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에는 다운타운 브로드웨이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극장공연이 활발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지금의 이스트 소호(Soho), 즉 맨해튼 동남부 지역에 위치한 보워리 극장(Bowery theater)이 견줄 만했다. 브로드웨이 극장이 보다 세련되고 영국적인 공연이었다면, 보워리 극장은 보다 대중적이고 미국적인, 애국심에 호소하는 공연이었다고 한다. 당시 다운타운 지역에는 상대적으로 고소득층인 영국계 거주민들이 많이 살았고, 남동쪽 이스트 소호 지역은 저소득층인 이주민들이 많이 살아 계층 간 갈등이 심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회경제적 차이가 공연문화의 차이로도 표출된 것이다. 실제 1849년 5월에는 보워리 극장 출신 미국인 배우(Edwin Forrest)의 팬들이 영국인 배우(W.C. Macready)가 공연 중이던 브로드웨이 극장 밖에서 경찰과 충돌하는 바람에 22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최재용 한국은행 강원본부장 / 편집=홍예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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