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모바일 구독자 240만
기고

독립운동과 학도병, 민주수호의 100년    

김동섭 한림대객원교수

1941년 11월, 운동장에 나와 있던 춘천고 학생들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머리에 용수(머리에 씌워 얼굴을 가리는 도구)를 쓰고 밧줄에 줄줄이 묶인 죄수들이 운동장 뒷길로 끌려가고 있었다. 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된 학생들이었다. 서대문형무소로 가기 위해 춘천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독서회는 조선 독립을 꿈꾸던 학생들의 모임이었다. 한국 학생들을 툭하면 때리던 일본인 교련 교사와 밀고를 일삼는 일본인 학생들을 응징했다.독서회 사건의 여파는 컸다. 24명이 체포되고, 12명이 2~4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광훈(홍천출신)과 고웅주(정선출신)는 일제의 고문에 옥사했다. 항일 비밀 결사조직인 상록회가 발각된 지 3년 만에 일어난 대규모 항일 사건이었다. 상록회는 독립 투사 양성을 목적으로 4개 학년에 걸쳐 비밀리 회원을 조직했다. 137명이 조사받고, 36명이 검찰에 넘겨져 10명이 투옥되고 백흥기(횡성출신)는 옥사했다.

춘천고가 오는 24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대학에 진학할 ‘고등보통학교’가 없던 강원도에 관립 고교로는 전국에서 13번째로 세워졌다. 5년제 학교로는 강원도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1924년에 세워진 춘천고 100년은 몇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도민들의 성금으로 만든 ‘강원도민의 학교’라는 점이다. 설립 비용의 1/3을 춘천이 맡고 나머지는 강원도내 20개 각 군의 주민들이 기부했다. 그 돈으로 학교 건물을 세우고 운동장을 넓혔다.

도민의 학교답게 일제시대 내내 입학생 비율은 춘천 출신이 30% 수준이었고 나머지는 영동과 영서의 각 초등학교에서 고루 들어왔다. 평안도와 함경도 등 이북지역에서도 매년 5~15명씩 입학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항일 민족주의 학교의 하나로 성장했다. 개교 이래 일제에 맞서 5차례 동맹휴학과 상록회와 독서회라는 2번의 항일조직 사건이 일어났다. 광주학생사건에 동조해 주동자 10여명이 퇴학당한 1929년 12월, ‘조선독립만세’ 함성은 춘천고 운동장에서 퍼져나갔다.

그동안 정부에서 애국지사로 서훈받은 이가 35명이다. 전국 고교 중 다섯 손가락안에 꼽을만큼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항일 전통은 학도병 역사로 이어졌다. 6·25전쟁 때에도 춘천고는 학생 3명 중의 한명 꼴인 300여명이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무려 29명이 군번도 없이 초연히 쓰러졌다.

강원도내 학교 중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했다. 4·19혁명 때도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3월21일 시위를 계획했으나 학생 지도부가 검거돼 무산됐다. 4월25일 학생 500여명이 학교 정문을 박차고 나가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해방 후 강원지역 창군(創軍)도 주도했다.

춘천과 원주, 강릉에 부대를 창설하는 역할을 한 게 김병휘 예비역 소장(강릉출신), 장호진 예비역 준장(화천출신)이었다. 강원도 최초의 언론사도 상록회 사건의 주역인 남궁태(춘천출신)가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합쳐 만들었다. 이처럼 춘천고가 개교 100년동안 이룬 성과는 단순한 춘천의 힘이 아니라 강원도의 힘이었다. 1970년대 입시 명문고로 발돋움한 것도 강원도 전역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이룬 성과였다.

100주년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명예졸업장이다. 졸업 석달을 앞두고 퇴학당한 상록회 사건의 김정철 선생은 88년만에 그의 딸이 명예졸업장을 받는다. 그들의 애국심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지만 우리는 그동안 그들을 잊고 살지 않았느냐는 반성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