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정일주의 지면 갤러리]독특한 세계관 속 조형 언어 탐구…그는 이미 하나의 ‘장르’

(2) 황영성 - 목가적 감수성으로 구현한 인간과 만물의 공존

◇황영성 作 'Family Story'(2009)

스스로 발전하는 작가. 개성적인 작품세계로 일가를 이룬 황영성(1941~)은 지금도 맹렬히 연소 중이다. 그의 작업열에 가뭄이란 없다. 1941년 강원도 철원 생으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온 작가는 여전히 작열하며 새로운 조형언어를 탐구하고 있다.

슬픈역사 겪은 우리 민족 대변하는 ‘소' 작가의 뮤즈

美대륙 여행 후 한 화면에 형상 분할 표현법 선보여

또 다른 도전 통해 양식 확장하며 나날이 자가발전

◇'Family Story'(2009)

■스스로 발전하는 작가의 영원한 뮤즈

지난해 광주 무각사에서 선보인 개인전 ‘소와 가족'에는 작게는 4호부터 크게는 200호가 넘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약 80여점을 선보였는데, 그중 200호 이상인 대작이 10점이 넘었다. 작가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작품의 크기는 물론 전시의 규모로도 증명된 셈이다.

소는 초가집, 자연, 가족 등 향토적이고 목가적인 소재로 작업해 온 작가의 영원한 뮤즈인데, 그 소는 사납거나 투박하지 않다. 그의 소는 일제강점기의 핍박, 민족 분단의 아픔과 같은 슬픈 역사를 경험한 우리 민족을 대변하는 주인공이다. 소가 단순한 소가 아니도록 작가는 자신, 더 나아가 ‘우리'의 경험과 기억을 50년 넘게 캔버스에 담아 왔다. ‘가족', ‘사랑'을 큰 줄기로 놓고 작업을 이어 온 작가는 주변의 소중한 것, 그리고 점점 귀하게 여겨지는 하찮은 것들을 나란히 붓으로 품는다. 그의 그림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처럼,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많은 일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황영성의 작품세계는 연대별로 명확히 구분된다. 1970년대의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회색시대', 1980년대 ‘녹색시대', 1990년대의 ‘모노크롬시대',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지금껏 그가 추구해 온 반구상 형태의 ‘가족이야기'로 말이다. 젊은 시절, 그는 “블랙과 화이트만으로도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스승(임직순·1921~1996년)의 말에 감명을 받아 흑백이 주를 이루는 작업을 했다. 이 흑백의 색감과 토속적인 주제는 큰 상과 영예로 이어졌다.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됐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곧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 형식의 변화를 꾀했다. 고공에서 내려본 고향의 벌판을 평면기법으로 포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른바 드론으로 벌판을 굽어본 것 같은 ‘드론 시점'이다. 색은 초록이 전면에 나섰다. 이런 작품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향토색 짙은 회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가족 이야기'

■해외여행에서 발견한 인간과 만물의 평화로운 공존

또 한 번의 도약이 찾아든다. 해외에서였다. 1990년대 초 아메리카 인디언을 연구하기 위해 떠난 해외연수가 빛이 됐다.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의 뿌리를 알면 자연스레 우리 문화의 진수를 터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 길로 1년 동안 미국, 멕시코, 과테말라, 콜롬비아, 페루 등지를 여행하며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여행 중에 걸프전이 발발했다. 그는 이때 뜻밖의 개안을 경험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인물, 나아가 모든 동식물과 무생물인 물과 바람, 공기 등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깨달은 것이다. 모든 가치를 존중하고 아끼는 것이 참다운 평화의 초석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깨침을 안고 귀국했다. 그리하여 공존과 평화와 화합을 이루기 위해, 한 화면에 여러 형상을 분할하는 표현법을 힘 있게 펼쳐 보인다.

작가는 인간 가족의 형상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폭넓게 자연 속의 가족과 말, 개, 닭, 호랑이 같은 동물의 모습뿐만 아니라 건물과 도시의 거리 풍경, 공장과 비행기 같은 현대 문명의 오브제 등을 다양하게 화면에 흩뿌린다. 이들 소재는 극도로 단순화된 형에서 시작해 전체가 조화를 이룬, 한 편의 구성적인 가족도로 결실을 본다. 각 소재의 표현 수위는 전체 속에서 적절히 조율된다. 미묘한 차이로 전개되는, 비슷한 조형적 단위들의 공존은 그림의 전체적인 조화와 화합을 북돋우며 평화로운 정경으로 거듭난다. 그림의 색감도 눈에 띈다. 회색과 청색을 중심으로 한 색채 대비 효과를 극적으로 사용하거나 한 가지 색을 파스텔 분위기로 톤만 바꾸며 변화무쌍한 ‘황영성 화풍'을 구사한다. 그는 이렇게 우리가 함께한 시간, 지나온 역사 등의 전체성에 대해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지극히 친근한 방식으로 전하고 환기시킨다.

◇'가족 이야기'(2000)

■2018년에 다시 방목한, 1970년대의 ‘회색지대'

황영성에게 전시는 또 다른 도전이다. 그는 늘 자신의 양식을 확장하고 모색하며 무르익은 작품을 전시한다. 2018년 서울 현대화랑에 마련된 개인전 역시 그랬다. 그는 신작들 대신 1970년대의 ‘회색시대'를 택했다. 그중에서도 구체적 형상이 선과 면으로 단순화된 조형적 변화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소의 침묵' 연작으로 전시장을 꾸몄다. 검게 채색된 소들은 작품의 배경이자 주제로, 절제된 감정의 표현을 함축한 대상이었다. 작가가 살아온 시대를 대변하듯, 여러 겹의 두터운 검정색 속에서 ‘나'와 ‘우리'를 상징하는 ‘소'는 단순하지만 탄탄한 선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검은 소'는 작가가 추구해 온 삶과 예술의 진실이 은유적으로 조형된 각별한 대상인 셈이다.

작품 이해를 강요하지 않고, 보는 즉시 알 수 있으며, 소소한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작가 황영성. 그는 이미 하나의 장르로서, 나날이 자가발전 중이다.

◇'소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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