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대중매체 속 실록이야기 ③영화 ‘사도’(下)

◇임오화변(壬午禍變)의 내용을 담고 있는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기사.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하게 된 결정적인 트리거 역할을 한 것은 1762년 5월에 벌어진, 이른바 ‘고변(반역을 고발)사건’이라고 불리는 ‘경언고변(景彦告變)’이 결정적이었다. ‘고변’을 한 나경언이 옷솔기에 숨겨서 갖고 온 문서 내용은 사도세자의 비행 10여 개를 나열하고 있었다.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영의정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은 그 글을 모두 읽고 영조에게 불태울 것을 요청한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들여 추궁하기 시작한다.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중략)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차라리 미친척을 하며 살라고 극언을 퍼붓는다. 영화 ‘사도’에서는 노론 벽파의 지도자 김상로가 나경언을 사주해 일을 꾸민 것으로 나온다.

불태워 없어져 구체적인 내용이 전하지는 않지만, 실록에는 반역이나 역모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글을 의미하는 ‘흉서(凶書)’로 표현한 만큼 상당한 수위의 내용들이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영화에서도 “임금(영조)을 죽이려고 작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조 입장에서는 7년 전인 1755년 소론 무리들이 자신을 음해한 사건(나주벽서사건)을 겪은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 이후 사도세자는 폐서인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로 부터 자결을 명받는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중략)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 5월13일)” 실록에 기록된 임오화변(壬午禍變) 당시의 상황은 말그대로 처절했다. 사도세자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임덕제마저 끌려나가자 사도세자는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라며 절규한다. 사도세자는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겠다고 읍소하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영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가 아들을 죽여달고 청했다는 사실이다.

신하들 마저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사도세자는 1762년 윤 5월13일 뒤주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당시의 실록 기록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후에 실록에는 뒤주가 일물(一物)로 표현된다·영조실록 117권, 영조 47년 8월 2일). 그날 이후 사도세자를 보필한 내관 박필수와 여승 가선, 그리고 기녀 다섯명이 죽임을 당하고 시강원과 익위사 관원들은 모두 파직된다. 마침내 뒤주에 갇힌지 8일이 지난 윤 5월21일 사도세자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실록은 그 내용을 “사도 세자가 훙서(薨逝)하였다(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21일)”라는 표현으로 간략하게 담아냈다.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찌 30년 부자의 은의(恩義·의리와 은혜)를 생각하지 않겠냐”며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영화 말미에는 영조가 정조(소지섭)의 청을 들어 사도세자의 기록(승정원 일기)을 물로 씻어 없애는 세초 작업 모습이 나온다. 임오화변이 일어난지 14년이 흐른 1776년 실제 세초작업이 진행된다. “사도(思悼)가 어두운 가운데에서 알면 반드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니(중략) 창의문 밖 차일암에 가서 세초(洗草)하라.(영조실록 127권, 영조 52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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