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기간 법관을 꿈꾸던 필자에게 법관이란 ‘어려운 법령을 논리적으로 해석, 적용하여 판결하는 사람’이었고, 사법연수생 시절까지의 공부 내용도 법령 및 판례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실무를 담당하면서 가장 괴리가 있었던 부분은, ‘법령’의 해석, 적용보다 ‘사실인정’이 업무에서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를 특히 괴롭게 했던 사건들은 대부분 ‘사실인정’이 문제된 것들이었다. 긴 신문을 듣다 보면 필자가 마치 거짓말탐지기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고, 사실관계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당사자들이 서로 더 교묘하게 필자를 속이려는 듯한 모습에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필자가 실체를 온전히 알고 재판한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에 관한 되물음이었다. 사건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사자나 피고인이고, 필자는 제3자의 입장에서 사후적으로 조제된 기록을 통해서만 사건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최대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여 기록을 꼼꼼히 검토하지만, 재판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보니 실수가 있지 않을까 늘 두렵다(물론 그 두려움이 필자로 하여금 늘 겸손하고 방심하지 않도록 채찍질해 준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법관은 사실인정을 거쳐 판결에 나아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경험칙(經驗則)이다. 경험칙이란 통상의 경험에서부터 귀납적·합리적으로 일반화된 규칙성, 사회통념에 비추어 사실관계를 추인하게 해주는 개연성의 규칙이다. 경험칙은 판결 이유에서 ‘사회통념’, ‘건전한 상식’과 같은 표현을 통해 명시적으로 설시되기도 하지만, 명시적인 설시 없이 사실인정 과정에서의 내적 추론의 토대로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법관 개개인이 인식한 경험칙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경험칙에 관하여는 몇 가지 의문이 따른다. 첫째, 개인마다 인식하는 경험칙의 내용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각자의 경험이 모두 다를 뿐 아니라, 그 경험을 일반화하는 과정에 개인의 가치관, 선호가 스며든다. 경험이 너무 적어도 문제이지만, 편향된 경험이 많이 쌓일 경우 더욱 확고한 편견이 형성되기도 한다. 사회적 지위나 성별, 성장환경 등 선천적·후천적 요인도 경험칙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 경험칙은 법률처럼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아서(이 점에서 이론이 정립된 자연법칙과 다르다), 개별 사건에서 추론 가능할 뿐 일반화된 경험칙을 확정하기 어렵고, 다수의 사회구성원이 이에 동의하는지도 알기 어렵다. 셋째, 다수가 동의하는 명제라 하여 그것이 경험칙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다수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반드시 규범적으로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소수가 옳을 때 그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다수결에 기초한 정치작용과 대비되는 사법작용의 본질적 역할이기도 하다.
이에 필자가 생각한 해법은 ‘겸손함’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경험칙이 반드시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검증가능성에 집중하게 된다. 지나치게 단정적인 논증을 경계하고, 대법원 판례를 숙지하며 혹시 반례가 있는지 유사 하급심까지 면밀히 검토한다. 그 과정에서 동료·선후배들, 다양한 구성의 비법조인 지인들과 치열하게 토론하기도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사건이 발생하므로 법관의 직접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독서 등을 통한 간접경험으로 최대한 보완하고자 노력한다. 때로는 필자의 한계를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고강도 달리기나 근력운동도 도움이 된다.
결국 법관이라면 사실인정의 수단인 ‘경험칙’이 자신만의 아집이 아닌 ‘건전한 사회통념’에 닿아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하고, 그 결단 뒤에도 오판가능성을 늘 경계하며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에 필자의 좌우명 중 하나로 부족한 글을 맺고자 한다. 매사에 당연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