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곡은 1551년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 상을 마쳤음에도 애통망극한 슬픔을 달랠 길 없어 홀연히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1년 뒤인 1555년 강릉으로 돌아와 외할머니 앞에서 자경문(自警文)을 지은 지 올해로 470년이 된다. 당시 가족과 지인들의 극심한 만류에도 공자는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라고 했다면서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타고난 기(氣)를 제대로 기르려면 산수를 버리고 어디서 구하겠는가”라며 만류를 뿌리쳤다. 율곡은 1년 남짓 내, 외금강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한중시사(韓中詩史)에 유례가 없는 600구 3000자의 대서사시 '풍악행(楓岳行)'을 남겼다. 이 '풍악행'은 시로써 산문을 대신한 걸작으로 마치 그림을 읽는 듯한 사실의 대서사시다.
지금까지 알려진 수많은 기행 시문 가운데 그래도 손꼽히는 최남선의 '금강예찬'이나 이광수의 '금강산기행'도 가멸찬 문력으로 빚어낸 율곡의 '풍악행'에 비하면 우선 실경 묘사의 재치에서부터 뒤진다. 특히 기행시의 백미(白眉)로까지 일컫고 있는 율곡의 '풍악행'은 사실 묘사의 재치와 감칠맛이 남달라 시중유화(詩中有畵), 즉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미 탐승한 기록만을 접해도 미지의 승경(勝景)에 대한 객관의 물상이 눈에 선해야 구실을 다하는 기행시오, 기행문이다. 그림 또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眞景山水)라 해도 겉모양만 그렸지, 금강산 골짜기가 품은 경이로운 속살은 그리지 못해 원경(遠景)만 짐작할 뿐이다.
금강산 절경이 얼마나 신비롭길래 율곡은 “입이 있어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붓이 있어도 글로 쓰기 어렵다”라고 했고, 김시습도 금강산을 돌아보고 “산에 올라서는 웃기만 하고 물가에 다다라서는 울기만 했다”니 당대 석학의 입과 붓마져 움츠러들게 한 금강산이다. 일찍이 금강산은 빼어난 자태로 인해 수많은 시인 묵객을 불렀고, 이들이 남긴 시부(詩賦)는 오늘날 금강산을 만방(萬邦)에 알린 원동이 되었다.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면 금강산은 우리 민족 누구나 꿈에 그리며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한 동경(憧憬)의 산이다. 심지어 중국인까지도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보기를 소원처럼 여겼을 정도다.
금강산은 철 따라 달리 불렀다. 봄은 불보살이 머문다고 해서 금강(金剛)이라 했고, 여름은 신선이 머문다고 해서 봉래(蓬萊), 가을은 단풍이 수를 놓아 풍악(楓岳), 겨울은 온 산이 흰 뼈와 같다고 해서 개골(皆骨)이라 불렀다. 이처럼 철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는 금강산을 율곡은 “이 산은 하늘에서 떨어져 나왔지, 속세에서 생겨난 산이 아니다”라고까지 극찬하며, 사흘 밤낮을 힘겹게 오른 비로봉 정상에서 ‘정복’이라 하지 않고 “더 이상 오를 곳이 없구나”라며 자연을 숭상한 나머지 경외(敬畏)의 대상으로 우러렀다. 600구 3000자의 대단원 '풍악행'은 오밀조밀한 금강산 외형뿐만 아니라 그 속을 거닐며 자연의 이법(理法)을 깨닫고 배운 율곡의 속 깊은 철학이 담겨져 있다.
얼마 전 이토록 아름다운 천하 명산이 세계적 자연경관으로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니 우리 선조들이 일찍이 시문으로 이름을 알린 덕분이라 뿌둣함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지척에 두고도 오가지 못하는 얄궂은 현실에 분노가 치밀 뿐이다. 언제까지 간절히 그리워하며 오고 가는 그날만을 생각해야 하는지. 율곡의 '풍악행'을 길라잡이 삼아 뒤밟아 볼 날은 언제쯤일까.
안타깝지만 470년 전 시로써 실경을 대신 묘사한 율곡의 주옥같은 '풍악행' 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