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유학 중이던 당시, 논문을 마무리할 즈음엔 거의 밤을 새우며 작업에 몰두했고, 새벽에 동이 트고 나서 몇 시간 지난 후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보며 겨우 정신을 차리곤 했다.
한참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필자는 다니던 한인교회로부터 뜻밖의 부탁을 받게 되면서 고생의 강도가 2배로 불어났던 기억이 난다. 당시 교포사회에서 2세 자녀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면서 부모와 불화를 겪는 가정이 많았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우등생으로 부모님의 자랑거리였던 자녀가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백인사회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원인을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돌리고 원망하는 자녀들이 꽤 있었다. 이 청소년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멘토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논문 마무리라는 큰 숙제가 있는 필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교포 2세들에게 자연스레 감정을 이입하여 상담하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1~2시간씩 그들을 만나 어려움을 듣고 가슴으로 상대방을 품는 일은 학위 논문을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들과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독일의 어두운 저녁 날씨처럼 우울했다.
귀국을 앞둔 상황에서 청소년 중 누구도 변한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 학기 강의를 마치고 최종 논문 심사를 위해 다시 독일에 방문하였을 때 아이들은 많이 성장하고 변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등 떠밀리다시피 한 봉사였지만 그 시간만큼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고 그 진심이 통해서였는지 아이들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논문과 청소년들을 돌봐주는 두 가지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필자를 곁에서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본 연구실 동료들이 필자가 학위 논문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연구실 동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되돌려 받았구나!’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내가 보여준 작은 사랑이 또 다른 도움으로 되돌아왔던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 사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아 생물이 살 수 없는 ‘사해’가 있다. 산맥에서 흘러 내려온 물은 갈릴리 호수에 생명체를 자라게 하고,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그 물은 요단강을 타고 사해로 흐르지만, 사해에 이르러서는 더 흐르지 않고 갇혀버려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된다. ‘사랑과 도움’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내가 사랑과 도움을 받고 나에게서 끝이 나면 생명이 살 수 없는 짠물, 썩은 물처럼 되지만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맑은 물로 선순환이 될 때, 나도 살고 상대도 살리는 생명수가 된다.
필자가 젊은 시절 겪었던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의 경험, 흐르지 못하고 갇힌 사해에서 생명체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주변 사람들과의 짧은 인사, 커피 한잔과 함께하는 가벼운 대화가 따뜻한 정을 나누는 시발점이 된다. 그렇게 시작된 이웃에 대한 작은 관심이 타인에게 작은 울림이 되고, 언젠간 나에게 축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오늘도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이 나로부터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