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축복과 주위분의 도움으로 이날 이때까지 환자를 진료할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해.』
대학병원 원장을 그만두고 속초로 낙향해 19년째 양양 산간오지를 찾아다니며 仁術(인술)을 베풀고 있는 이기섭(李基燮·89·강원도 속초시 동명동)박사. 그의 말속에는 삶에 대한 진한 향기가 묻어났다.
속초시 동명동에 위치한 李박사의 자택은 노부부만 단둘이 사는지라 고즈녁하기만 했다.
李박사는 화단으로 쏟아져 내리는 봄 햇살을 툭툭 차며 청년처럼 현관문을 걸어 나와 기자를 맞았다. 부인 咸동실(83)씨가 과일을 내오고 그는 커피를 권한다.
『95세이신 文창모 박사의 은퇴로 이제는 국내 최고령 현역 의사가 되셨는데 소감은 어떻습니까.』
『소감은 무슨…. 어제 文박사를 만나고 돌아왔어. 내가 후배니 찾아뵙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어.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진료하겠다고 맹세했는데…. 결국은 세월의 무게를 인정할 수 밖에.』
李박사는 흰 가운을 벗은 노선배를 보고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화 내용을 밝혔다.
그는 지난해 文박사와 함께 의료계 폐업 사태 속에서도 꿋꿋하게 환자 돌보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하는듯 했다.
李박사는 4·19등 정치 격랑에 휩싸이는 게 싫어 1961년 이화여대부속병원 원장직을 그만두고 속초로 낙향했다. 그 뒤 속초시내 중앙동 시장입구에서 개업한 외과의원과 속초보건소 속초의료원을 거치며 환자를 돌봤다.
『4·19가 나자 공부는 하지 않고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병원장인 나를 험담하더라고. 학생들한테 배신당했다는 생각도 들고 마침 이화여대 총장이었던 金활란 박사가 의사는 무의촌에 가서 봉사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하는거야. 그래서 집사람 반대를 무릅쓰고 62년에 속초로 낙향했지. 돈 명예도 집착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이야. 다 따지고 보면 부질없는 것인데도 말이야.』
속초로 낙향한 뒤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는 李박사의 말속엔 격동의 역사를 진솔하게 살아 온 노의사의 진한 고집이 담겨 있었다.
李박사는 1913년 황해도 수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광산업을 하고 있어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일본경도대학에 유학을 다녀올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李박사는 『지난 21일 작고한 鄭周永현대그룹 명예회장도 젊어서 아버지 광산에서 일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李박사는 해주고등보통학교 2학년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커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간경화증이었는데 약이 변변한게 있나. 의대에 진학한 것도 어머니같은 환자를 돌보고 싶어서였지. 그때나 지금이나 의사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보수도 안정적인 것이 학교 선택의 또다른 이유였어.』
『너무 솔직한 것 아닙니까.』 기자가 물었다.
『솔직은 무슨 다 그런 것 아니야. 나도 한때는 개업을 하고 돈을 벌기도 했어. 다른 사람과 달랐다면 그때 땅투기 안하고 아이들 공부시킬 만큼만 벌었다는 것이지.』
李박사는 의사의 직분과 재물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의사들도 장사꾼이 될 우려가 있다며 젊은 의사들에게 이 사회에 대한 끝없는 봉사와 헌신을 주문했다.
李박사가 무의촌 의료봉사 활동을 시작한 것은 속초의료원을 그만둔 지난 82년. 젊은 시절 오지마을 진료활동에 나섰다가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 주민들을 목격한 이후 어렸을때부터 다짐했던 인도주의 의료봉사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李박사는 매주 목요일이면 어김 없이 왕진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서 버스를 2번이나 갈아타고 오지마을 진료를 다니고 있다.
『시바이처니 허준이니 그런 말 쓰지마. 마누라가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질색하는지 몰라. 내 건강도 지킬 겸 내가 좋아서 하는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지난해 의약분업과 관련 의사들의 파업으로 시끄러울 때 주위에서 인기드라마를 빗대 허준이니 시바이처니 하는 소리에 영 부담스러웠다는 李박사는 이 사회의 냄비근성이 문제라며 혀를 끌끌 찼다.
李박사는 의약분업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의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환자의 곁을 떠나서는 안되지만 정부가 국민부담만 가중시키는 정책을 졸속으로 추진해 막대한 예산만 낭비하게 됐다는 것. 이에 따라 의약분업 개선안은 의사 약사 시민등 이해당사자 모두가 참여해 신중히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료비와 용돈은 어떻게 마련하십니까.』
『장성한 딸들과 아들한테서 받지. 모자라는 것은 주위에서 좀 도와주기도 하고. 약 몇봉지 지어 주는 것이 사실 큰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봉사하는 시간내기가 더 힘들지. 모든 의사들이 할려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어.』 우문현답이었다.
李박사의 왕진대상 주민들은 설악산 자락에 파묻혀 있는 양양지역 대표적 오지마을인 서면의 서림리와 황이리 갈천리 영덕리등 4곳. 이곳 180가구 600여명의 주민 가운데 李박사의 왕진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초창기 그가 왕진 오는 날이면 서림보건 진료소에는 마을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주민수가 900명 가까이 됐는데 고령화로 많이 줄었어. 이제는 보건소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노인들이라 노인병을 주로 치료해 주고 있어.』
한때 백내장 수술을 받기도 했던 李박사는 처음 무료진료를 할 당시에는 딸에게 용돈을 타내 시력이 나쁜 사람들의 안경을 맞춰줬다며 당시 수첩에 꼼꼼히 적은 180여명의 명단과 시력을 보여줬다.
李박사는 『앞으로도 힘이 다할 때까지는 이들 오지 마을의 의료봉사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의 방에는 강원도 속초시, 양양군 등 각 기관이 그의 의료봉사 활동을 기려 준 감사장 등이 수북히 쌓여 있다. 지난해 5월에는 제8회 중외박애상 수상을, 지난 21일에는 보령제약 의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李박사는 의료봉사활동을 하지 않는 날은 등산과 골프 등으로 체력관리를 하고 있다.
『내가 취미가 골프라고 하니까 남들이 돈을 많이 모은 줄 알고 있는데. 사실 비밀인데 그것 공짜로 치는거야.』
지금도 한달에 1~2번 속초 한일골프장을 이용하고 있다는 李박사는 75세때 골프를 배울 당시 필드에서 담배꽁초를 줍고 다니는 자신을 보고 골프장측에서 제일 고령인 의사가 주위환경을 깨끗이 한다며 무료로 이용하게 해줬다고 설명했다.
李박사는 64년 설악산 산악회를 창립했으며 초창기 설악제 위원장등을 역임하는 등 속초와 설악산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고 있다. 93년에는 「산악인의 문」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6,000만원을 모금 설악산 소공원 앞에 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1937년 부인 咸씨와 중매결혼한 李박사는 벌써 64년간 해로하고 있다.
지난 97년에는 1남4녀의 자식들이 결혼 6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열어줬다며 소년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李박사는 『아름다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들어 간다』고 했다. 『풀 한포기 나무하나도 모두가 소중한 생명력을 가지고 향기를 만들어 낸다』는 李박사에게서 인술의 향기가 세상속으로 퍼져나가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襄陽=金光熙기자·heekim@kangwonilb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