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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일반

[강원논단]지도자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금 권력의 진공상태에 있다. 사회전반에 걸쳐 블랙홀이 출현하고 있다. '누가 워싱턴시를 움직이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조사에서 앤소니 킹교수의 대답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짧막한 결론이었다.

 이것은 앨빈 토플러가 권위주의적인 제2물결의 정치구조에 제3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이를 헤쳐나갈 수 없는 정치지도자의 '실패한 리더십'을 보고 평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1990년대 이후 '리더십의 실패'로 인해 표류하고 있는 사회의 정치위기를 '정치의 무덤' 이라고 까지 표현한다. 우리나라의 정치드라마를 보고 하는 말과도 같다.

 그러면 오늘날의 정치는 왜 무덤화되고 있는가? 그리고 정치지도자는 왜 그 무덤속의 주검으로 비유되는가?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지도자들의 시대착오적인 정치관 때문이다. 농업사회(제1물결)의 농민을 지배하던 군주의 강력한 리더십이 산업사회(제2물결)의 거대구조와 구성원을 관리할 수 없듯이 산업사회의 권위주의적 지도력만으로는 높은 수준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요구하는 탈중앙집권적이고 탈권위주의적인 정보사회(제3물결)의 열린 시민을 이끌고 나갈 수 없다. 토플러도 루스벨트나 처칠, 드골과 같이 산업사회의 강력한 지도자나 고집세고 독선적인 케네디와 대처를 찾는 것은 일종의 향수에서 나온 행위이며 구시대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찾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이 아직도 앓고 있는 박정희 향수병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문에 우리의 지도자와 시민은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제3의 물결을 타고 열린 세상으로 무한 질주하려는 시민을 '아직도' 제2물결속을 헤매고 있는 지도자들은 낡은 권위를 앞세워 붙잡아 보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연일 언론에 비치는 실패한 리더쉽이 그렇고 그것을 욕하며 닮아가는 차세대의 리더십이 또한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야말로 이상적인 구세주라고 자처하는가 하면 구세주 콤플렉스를 치유할 정치의사는 자신뿐이라고 외쳐댄다.

 그러나 시민은 맨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바꾸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메시아 콤플렉스'(Messiah complex)에 더 이상 빠져 있지 않다. 그 환상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시민이 아니라 오히려 의사(擬似)구세주인 정치지도자들 뿐일 것이다. 시민이 정치극에 냉소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객석에 남아 정치무대를 보고 안쓰러워 하는 시민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객석을 아예 떠나버린다. 어느새 시민에게는 정치로부터의 도피가 자유에로의 도피가 되어버린 것이다. 권위적이고 무례하기까지 한 정치권력의 새디즘(sadism: 정치적 가학증)에 대해 시민은 더 이상 마음 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때마다 그칠줄 모르고 내려가는 투표율이나 신문과 방송의 정치뉴스에 대한 외면은 민심이 정치를 얼마나 멀리 하려는지를, 즉 우리의 정치로부터의 도피메커니즘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반영하는 지표일 것이다.

 요즘 세간에 떠도는 “너, 아직도 담배피우니?”로 부터 시작하여 “너, 아직도 투표하러 다니냐?”라든지 “너, 아직도 정치뉴스보니?”를 거쳐 “너, 아직도 정치하냐?”로 끝나는 <아직도> 시리즈가 우리의 정치현실을 냉소적으로 비웃기 위해 지어낸 질문들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쯤되면 우리 시민의 정치지도자에 대한 피로는 극에 달해 피로골절 상태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적지 않은 시민들이 히딩크의 탈권위주의적인 리더십으로부터 위안받거나 치료받고 싶어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리더십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그에게서 다소라도 치유받으려는 시민의 보상심리와 대안심리는 그것을 과대포장한 히딩크식 리더쉽의 신드롬까지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더 이상 메시아컴플렉스의 해결사로서 자처하지 말아야 한다. 그 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상처입은 시민의 정신적 외상(trauma)을 치료해줄 품위있고 예의바른 자원봉사자로 나서야 할 것이다.

 토플러도 제3물결의 지도자가 지녀야할 필수적인 덕목이 독단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능력에 있음을 강조한다. 내일의 지도자는 그가 지녀야 할 필요충분조건이 불도저같이 밀고 나가는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상상력에 있다는 것, 과대망상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서의 리더십의 제한적 성격을 스스로 인식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현재보다 더 다양한 사회, 즉 훨씬 더 능동적인 참여의 사회를 이끌어 나갈 탈중앙집권적이고 탈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이 요구된다. “양반 못된 것이 장에 가 호령하는 시대”는 이미 지난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시민은 없기 때문이다.

 〈이광래 강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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