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미워하지 않고, 어버이를 존경하는 사람은 남에게 오만하지 않는다.” 효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고려충신 이장밀의 아들 성무, 선무, 춘무, 양무 4형제는 효성이 지극했다. 늙으신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누워 한겨울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4형제는 꽁꽁 얼어붙은 냇가에 가서 얼음을 두드리며 잉어를 구하게 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자 하늘도 감동했는지 얼음이 갈라지며 잉어가 튀어 올랐다. 이를 어머니에게 드리자 병환은 씻은 듯이 나았다. 당시 이들 4형제의 효는 하늘이 낸 것이라 하여 태종 임금께서 효자 정려를 내리면서 “하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여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하였네. 중국의 효자 왕상이 어찌 혼자만 효행의 명성을 얻었다고 할 것인가!”라고 찬탄했다. 태종 17년(1417년)의 일이니 올해로 600주년이 된다.
그 뒤 세종 임금은 1431년 이 같은 행실을 그림으로 그려 '삼강행실도'를 편찬케 한 다음 국민 도덕 교본으로 삼도록 했으며, 마을 입구에 이를 표창하기 위하여 정문(旌門)을 높게 세워 지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다. 4형제가 한꺼번에 정려를 받은 것도 우리나라 최초요, 정문을 세워 표창한 것도 최초다. 또 숙종 32년(1706년) 양무의 10세손 이당과 이민 형제가 효자로 정려를 받음으로 해서 강릉시 교동 군정교 옆에 위치한 영해이씨이세육효지려(寧海李氏二世六孝之閭)는 우리나라 대표 효자각이 됐다.
그리고 강릉을 문향(文鄕), 예향(禮鄕)이라 부르게 된 근본 동기가 됐다. '문향'은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한 고을, '예향'은 일찍이 효행으로 이름난 고을이라 하여 붙여진 강릉의 매김말이다. 강릉에는 600년 전 이들 4형제가 정려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까지 효행이 뛰어나 그 행적이 기록에 전하는 효자만도 200여명이 넘었으며, 아름다운 행실을 기린 효자 열녀각만도 30여개가 남아 있다. 송강 정철은 1580년 관동을 유람하다 경포대에 올라 “강릉대도호 풍속이 좋을씨고 절효정문이 고을고을 버티어 섰네”라고 읊조렸으며, 허균도 “강릉은 풍속이 순박하여 예부터 효도와 정절을 지킨 사람이 많아 이를 기린 정표(旌表)가 마을 사이에 잇달아 보였다”고 했다.
우리는 그간 자랑스러운 물림상인 효를 너무나 홀대해 왔다. 새마을 정신의 기치 아래 효가 빠진 국민교육헌장을 얼음에 박을 밀듯 읽었고, 산업사회로 치달으면서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친 우리의 효다.
요즘 곳곳에서 저마다 나라님이 되면 정치를 바로잡고 민초의 삶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함성이 드높다. 게다가 반려동물은 챙기겠다고 앞다투어 외치면서 백 가지 행실의 근본이요, 만 가지 가르침의 근원이자, 풍속 순화의 원천인 '효'의 중요성을 외치는 사람은 없다. 영해이씨 4형제의 효행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효자각은 역사적 가치, 교육적 가치, 후세에 대물림해야 할 아름다운 가치가 차고 넘치는 데도 아직까지 문화재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영원한 달빛과도 같은 아름다운 효, 쾌 묵었다 구박하는 곳엔 오늘이 있을망정 내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