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년기 시절인 1960년대 초등학교로 돌아간다. 정부에서도 자립, 생산을 강조해 당시 학교에서 운동장 가에 호박을 줄레줄레 심고 실습지에 이름 모를 약초들이 무성했다. 당번을 정해 학교 관사 옆에 토끼, 돼지 등 가축을 사육했다. 식량이 부족해 가루 분유를 배급받고 숙직실에 둘러앉아 옥수수 죽을 배식받던 시절이다.
운동장 가로 늘어선 아름드리 벚나무 아래에서 까만 버찌를 주워 먹으며 허기를 달랜다. 급기야 나무에 올라 따 먹다가 선생님한테 들켜 혼쭐나던 시절이 꿈만 같다. 배를 채우기 위해 접칼을 목에 걸고 다니던 유년기 시절, 관사 뒤편의 뚱딴지를 캐 먹어도 맥령(麥嶺) 보릿고개 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문둥이가 겁을 줘도 진달래꽃을 입이 파랗도록 따 먹고, 찔레 순을 꺾으며 가재와 개구리를 잡던 시절, 소나무 순이며 논둑에 시광을 국수처럼 길게 늘여 배를 채우던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드름산 아래서 신작로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6학년 담임이신 김교민(敎民) 선생님. 실습 때면 외치셨다. 죽으면 손이 썩으니 많이 쓰자고. 내 경우 영혼까지 글과 그림이 샘솟도록 은사님이 파종해 주셨다. 유난히 예능에 열정적이시던 선생님, 재미 없는 세모뿔, 네모뿔, 원기둥 석고를 수업시간마다 내놓고 데생을 가르치셨고, 방과 후 서예를 가르치시며 손수 황모 비싼 붓을 사다 필력을 길러주셨다. 실기대회 출전 전날 선생님 댁에서 하룻밤 거할 때 선생님도 밥을 드신다는 엄청난 사실을 목격하며 신기했던 시절, 지금은 어떤가! 모두가 열려 있는 신비감이라곤 모두 증발한 과학 로봇 시대가 아닌가!
은사님은 코로나19 돌림병이 고개를 들기 직전인 2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무궁화선양사업에 남다른 사랑으로 어느 학교에 부임하던 향토관, 무궁화동산을 만드셔 만년엔 무궁화 교장선생님이란 칭송이 자자하시던 은사님. 스승의 날이면 수녀원 뒷골목에 노스승님을 찾아간다. 항상 퇴역장군의 전리품처럼 수많은 무궁화 관련 소장품들이 집 안에 가득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에 유작을 기증할 것인가 물어 오시며 한서 무궁화 고장인 홍천에 의향을 주셨다.
그런 유훈을 받들어 올 6월 초, 애장품 50여점을 무궁화 고장 홍천에 기쁜 마음으로 전달했다. 고귀한 뜻을 잘 이어받겠다고 가족에게 감사패를 전해주신 홍천군수님과 몇 차례 방법을 논의한 한서장학회 상임이사 돌 박사, 그리고 버리면 쓰레기요, 활용하면 자원이라고 힘을 보태준 YMCA 허 이사장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