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대산에서 발원한 소양강은 강원의 젖줄이다. 선사시대부터 강을 따라 형성된 부락들은 오늘날 인제, 고성, 양구, 홍천, 춘천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치수를 위한 소양강댐 사업은 1950년대 초부터 검토가 이뤄졌지만, 장면(張勉)내각 시절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취소됐다. 1960년대 들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발전과 함께 용수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소양강댐 건설계획을 재개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서울지하철 1호선과 함께 직접 챙긴 3대 국책사업 중 하나였다.
소양강 다목적댐은 1967년 4월 15일 착공해 6년 6개월만인 1973년 10월 15일 완공됐다. 어느덧 반세기동안 제자리를 지켜온 소양강댐은 그 나이만큼이나 수많은 사연을 남겼다. 올해 창간 78주년을 맞은 강원일보는 소양강댐의 시작부터 끝까지 곁에서 함께한 도내 유일의 언론사다. 당시 강원일보에 보도된 기사들을 중심으로 50년 소양강댐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1973년 10월 15일 기념비적인 댐의 탄생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춘천시와 춘성군 주민들이 삼삼오오 신북읍 소양강댐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새로 닦인 길을 따라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들과 도포에 갓을 쓴 어르신들, 빵떡모자를 눌러쓴 남녀 학생들이 다수를 이뤘다. 이들은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호수와 성벽처럼 솟은 우람한 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높이 123m, 길이 530m 사력댐의 위용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내는 주민들. 모두 6,000여 명에 달했다. 오전 11시가 가까워지자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통해 주민들을 모았다. 귀빈석에는 김종필 국무총리, 삼척 출신 동곡 김진만 국회부의장, 장예준 건설부 장관 등 정부 인사들과 도 단위 기관장들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맑은 가을하늘 아래 소양강 다목적댐 정상에서 역사적인 준공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소양강댐 준공식 다음 날인 10월 16일자에 실린 강원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준공식 행사 장면이 생생하다. 해당 기사의 일부를 아래에 옮겨본다. 독자들에게 시대적 느낌과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당시 기사에 쓰인 표현을 최대한 그대로 담았다.
준공식이 끝난 후에는 댐 공사 중 희생된 37명의 위령제 및 위령탑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탑은 댐 동쪽에 마련됐다. 넓은 소양호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위치였다. 희생자 37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위령탑이 드러나고 장엄한 음악이 울려 퍼지자 참석한 유가족들은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댐 공사 도중에 여러 차례 현장을 시찰했고 담수식에도 참석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에 오지 않았다. 태국에서 쿠데타에 반발해 데모하던 현지 학생 수백 명이 군의 총탄에 사망하면서 한국교민 400여 명의 안전에 대한 우려가 나오던 시점이고, 당일에도 국빈 방문 및 한국-멕시코 경제회의가 잇따라 열리며 짬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때는 청와대에서 소양강댐이 위치한 춘성군 신북면까지 오가려면 현재보다 몇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으니 말이다.

■‘민족의 대역사(大役事)’ 그 시작은
오대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소양강은 춘천 북쪽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최대 지류로 총길이 166.2㎞에 달한다. 소양강과 북한강의 합류 지점에서 12㎞ 떨어진 이름 모를 계곡이 댐 건설 적지로 확정됐다. 1965년 일본에 대한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면서 재원도 마련됐다.
당초 수력발전 전용으로 계획됐으나 다목적댐으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수자원개발공사(현 한국수자원공사)도 태어났다.
콘크리트댐에서 사력댐으로 바뀐 사연은 유명하다. 초대형 댐에 들어갈 시멘트량은 당시 국내 생산량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공사인 현대건설 입장에서는 콘크리트로 짓게 되면 시멘트를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으니 이른바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
강원도 통천 출신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그 결과 사력댐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댐 건설부지 인근에 흙과 모래 자갈이 넘쳐났으니 운송비를 그만큼 아낄 수 있던 것이다. 이미 설계비 등이 대거 투입된 상황이었지만 정주영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 설득에 총력을 기울였다. 콘크리트댐은 폭격받으면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서울이 순식간에 잠기지만 사력댐은 폭파돼도 주저앉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부각했다. 군 경험이 풍부한 박 대통령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일만한 브리핑이었다. 결국 역사적인 소양강댐 공법은 사력식으로 변경됐다.
이는 유사이래 우리 민족이 진행했던 가장 큰 프로젝트였다. 소양강댐의 성공적인 건설은 이후 국내 건축 및 토목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소양강댐은 완공 이후 다섯 차례 이상 있었던 대형 홍수를 어김없이 방어해 서울 침수를 막아냈다. 특히 지대가 낮은 서울 강남지역은 소양강댐이 없었다면 아예 형성되지도 못했으리라. 소양강댐 건설이 우리나라 최고 알짜입지, 수천조 원의 가치를 지녔다는 강남 태동의 토대가 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