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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옳은 말 하는 신하 꺾는다며 선조 강하게 비판했던 '율곡'

왕을 꾸짖는 율곡 이이의 ‘결기’(상)

◇율곡 이이 표준영정

율곡(栗谷) 이이(1536~1584·이하 율곡)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 개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려 아홉 차례의 과거에서 장원급제에 오르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한 그는 정치적, 사회적 폐단을 일소하기 위한 개혁안인 ‘경장론(更張論)’을 주창, 현대에도 많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인물이다. 율곡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언급된 것은 1564년, 명종19년 때의 일이다. “생원과 진사를 명정전 뜰에서 방방(放榜·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발표와 그 의식)하였다. 생원 제1등은 이이(李珥)이고 진사 제1등은 조원(趙瑗)이었다.(명종실록 30권, 명종 19년 7월 28일)” 생원시 장원급제를 통한 화려한 등장이다. 호조좌랑 자리를 시작으로 이조판서에 오르기까지 20년(1564~1864)에 걸친 관직생활 속에서 그가 끊임없이 강조한 것은 군주의 정치적 자질, 즉 리더십에 관한 것이었다. 변통(變通·형편과 경우에 따라서 일을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함)과 경장(更張·사회의 폐단을 개혁하여 새롭게 하는 것)으로 대변되는 그의 철학적 소신과 강직한 성품 때문에 왕과의 관계는 항상 갈등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1574년(선조 7년) 황랍(黃蠟·꿀벌의 집에서 꿀을 짜내고 찌끼를 끓여 만든 기름덩이)과 관련된 사건이다.

◇선조수정실록 8권, 선조 7년 3월1일 병자 3번째 기사

선조는 의영고(義盈庫·기름과 꿀, 후추 따위의 공급·관리를 맡아보던 관아)에 명을 내려 황랍 500근(300kg)을 대내(大內·임금과 왕비, 왕대비들이 거처하는 곳)에 들이도록 한다(선조수정실록 8권, 선조 7년 3월 1일). 이에 대해 율곡을 비롯한 신하들은 선조에게 황랍을 왜 대내에 들이려고 했는지 묻는다. 이는 시중에 선조가 후궁에게 주기 위해 궁중에서 은부처를 주조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율곡은 “외간에 전파되는 말이 혹자는 장차 불상(佛像)을 만들 것이라고는 하고 혹자는 장차 불사(佛事)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고 말하자, 선조는 “옛적부터 내려오는 불상이 또한 많은데 새로 만들어서 무엇할 것인가?”하고 반문하며 억측이라고 주장한다(선조실록 8권, 선조 7년 3월 20일).

◇대동야승 부계기문

율곡은 사용처가 올바르면 그것을 밝혀 백성들 사이에 퍼져있는 의혹을 풀어야하고 그렇지 않다면 명을 거두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그야말로 대노한다. “임금이 쓸 것을 위협하여 물으니, 이런 일도 차마 한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이 말 속에는 ‘모반도 꾀할 수 있을 인물’이라는 강한 질타와 경고의 뜻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율곡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경전을 잘못 인용하여 간신(諫臣·임금에게 옳은 말로 간하는 신하)의 말을 꺾으시니, 이것은 전하께서 평소에 글읽는 공이 다만 간언을 물리치는 자료가 되었을 뿐입니다.(대동야승 부계기문)” 라며 강하게 비난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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