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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강원의 항구기행]야트막한 육향산 아래 등대처럼 반짝이는 여름날의 추억

(2) 삼척 정라진
초교 4학년 방학 난생 처음 찾아간 포구
어선이 쏟아낸 어마어마한 양의 물고기
연탄불에 구워주시던 생선 맛 잊지 못해
누군가 두 번째 고향이 어디냐 묻는다면
형과의 기억 가득한 정라진이라 답할 것

형, 정라진(汀羅津)에 다녀왔어요.

사람들은 보통 삼척항, 정라항이라고 부르는데 저는 옛 이름 그대로 정라진이라고 하는 게 좋습니다. 풀어서 쓰면 비단처럼 아름다운 나루(포구)란 뜻이겠지요.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나룻가를 나릿가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정라진 중간에 자리한 골짜기 이름이 나릿골로 된 듯합니다.

삼척항이라 하면 왠지 군항(軍港)이나 공업항 같고 정라항은 어항(漁港)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정라진이라 중얼거리면 아주 멀리 있는 기억이 등대처럼 반짝이며 떠오릅니다.

그렇지요. 정라진은 어느 산골 소년이 찾아간 첫 번째 포구였지요. 그 포구와 가까운 산비탈 중간쯤에 형의 가족이 살고 있었고. 그걸 제가 어떻게 잊어버리겠어요.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었지요. 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흙먼지가 날리는 대관령을 넘었고(저는 멀미를 두 번이나 했을 겁니다), 강릉역에서 삼척선 기차를 탔습니다. 태어나 처음 타보는 기차였어요. 안인쯤에서 바다도 처음 보았고 그리고 캄캄한 터널들이 이어졌지요.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매캐한 연기. 터널을 빠져나오면 보이는 바다, 바다, 여름 바다. 버스처럼 심하게 덜컹거리고 흔들리지 않아 기차에선 멀미를 하지 않는다 하였지요. 하지만 저는 어느 순간 앞으로 가던 기차가 갑자기 뒤로 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곤 그대로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토하기 시작했지요. 마주 보고 앉는 의자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데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렇게 정동진역, 옥계역, 묵호역, 북평역, 후진역을 거쳐 삼척역에 도착했던 것이지요.

삼척으로 이사 간 형네 집은 정라극장 건너편에 있었지요. 육향산(六香山)은 정라극장 옆에 있었고요. 정라진의 어선들은 야트막한 언덕길을 넘어가야 볼 수 있었습니다. 형의 집 마당에 서면 오른편 멀리 동양시멘트(지금은 삼표시멘트) 공장이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했는데 그곳 역시 제가 처음 보는 시멘트공장이었지요. 사실 그 여행에서 경험한 거의 모든 게 제겐 처음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대관령을 넘은 것, 기차를 타본 것, 바다를 본 것, 해수욕을 한 것, 그리고 형이 2층 영사실에서 영사기를 돌렸던 정라극장에 주인 몰래 들어가 영화를 본 것까지. 그 모든 게 대관령에서 아주 가까운 이웃사촌으로 살았던 인연 덕분이었겠지요. 첫 번째 방문을 시작으로 저는 방학만 되면 엄마를 졸라 삼척에 보내 달라 고집을 부렸고 형도 누나, 동생과 함께 대관령을 찾아왔었지요.

형, 사실 정라진에서 경험했던 일들의 앞뒤 순서가 지금은 가물가물하기도 해요.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요. 자전거를 타고 처음 정라진에 갔다가 비린내 가득한 포구에서 미끄러져 자빠진 일도 기억나네요. 수산물을 다루는 포구가 그렇게 미끄러운 줄 몰랐거든요. 방파제에서 놀다가 나릿가 아이들에게 잡혀 테트라포드 안까지 끌려갔던 일도 있지요. 그 속에서 또 난생 처음 담배까지 피웠으니...... 어느 비오는 날의 포구에선 바다에 나갔다가 명을 달리한 이의 시신이 가마니에 덮여 있는 걸 멀리서 훔쳐보았던 적도 있네요. 바다는 무서운 곳이라는 걸 실감한 날이기도 했지요. 그럼에도 어선이 들어와 어마어마한 양의 물고기를 쏟아놓는 포구는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어요. 산골마을의 장날에 난전에서 보는 물고기는 물고기도 아니었어요. 나릿가 집들의 마당 빨랫줄마다 걸려 있는 물고기들도 제겐 이색적이기만 했으니까요. 평안도 말을 쓰는 형의 아버지는 어두워질 무렵이면 늘 반쯤 말린 물고기 몇 마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고 어머니는 연탄불에 구워주셨지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네요.

정라진이 다른 포구들과 다른 점은 육향산이 있다는 것일 테지요. 예전엔 섬이었는데 지금은 육지가 된 이 야트막한 산 정상엔 눈여겨볼 만한 비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許穆)이 해일과 홍수가 심한 삼척을 위해 짓고 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임금의 은총과 수령의 치적을 기린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가 그것입니다. 오래전 정라진은 동해의 중요한 군항이었다고도 하네요. 육향산엔 포진지(砲陣地)가 있었고요. 그런 사실을 모르던 어린 내가 형의 집 마당에서 바라본 육향산은 어떤 산이었을까요. 밤이면 산꼭대기의 나무가 부처님으로 보인다는 말을 듣고 오래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다시 올라가본 육향산은 허목의 동해송(東海頌)처럼 오랜 세월 동안 정라진을 지켜주는 한 그루 나무부처로 보였습니다.

형, 이번 정라진 방문의 점심 메뉴는 곰치국으로 정했습니다. 인상이 다소 험한 곰치로 끓인 곰치국도 가격이 많이 올랐더군요. 방파제 입구의 식당에 앉아 익숙한 경상도 사투리를 들으며 벌건 국물에 흰 살을 드러낸 곰치를 수저로 떠서 훌훌 삼켰지요.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휴지로 훔쳐내며. 신 김치를 넣어 끓인 곰치국은 얼큰하고 시원해서 속 푸는 데엔 최고라고 봅니다. 지난 며칠의 숙취가 단번에 날아가는 느낌이어서 삼척 대게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배를 채웠으니 이번엔 정라진이 내려다보이는 나릿가 산동네를 올라가보기로 했지요. 좁은 골목과 급경사의 계단으로 이어진 산동네는 포구와 떼려고 해야 뗄 수가 없는 관계겠지요. 지금은 산자락에 자리한 집들이 보수와 개량을 해서 그런지 옛날과 많이 달라졌더군요. 포구와 바짝 붙어 다닥다닥 지어져 있는 산자락 집들이 남아 있는 곳은 강원도에선 정라진과 묵호항뿐일 겁니다. 제가 정라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형과 형의 친척이 살았던 집도 그러했으니까요. 나릿골 공원에 앉아 땀을 식히는데 문득 옛날 정라진에서 살 때 형은 그 집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더군요. 어린 나는 방학 때 정라진으로 놀러가는 게 생일보다 더 즐거웠지만 그곳에서 사는 형은 당시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4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물어봅니다.

형, 누군가가 두 번째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저는 정라진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 까닭을 묻는다면 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정라극장의 영사실에서 형이 틀어주던 영화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테지요. 그때 형은 제게 눈물 콧물 흘리는 멜로영화나 삼류 갱영화를 보여준 게 아니라 넓고 넓은 동해바다의 동해송을 들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라극장이 있던 정라삼거리에서 오래 서성이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 아버지 장례식 때 상복을 입고 기꺼이 상주가 되어준 거 늘 잊지 않을게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사진 왼쪽부터 졸음에 잠겨 있는 한낮의 어선들. 지진해일 안전타워. 비석 뒷면엔 허목의 동해송이 새겨져 있는 척주동해비각. 전망대로 올라가는 산동네 비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