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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 여인열전 ① 어우동(中)

◇성종실록 122권, 성종 11년 10월 18일

“태강수(泰江守)의 아내 구마(丘麻)는 간음을 행한 것이 창기(娼妓)와 같았으므로…(연산군일기 38권·연산 6년 6월12일)” 조선왕조실록은 어우동의 본명을 ‘박구마’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구마는 시경(詩經) ‘구중유마(丘中有麻)’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이 “여자가 바람이 나는 일을 이르는 말”이라는 점에서 본명 보다는 경멸의 의미를 담아 부른 것으로 보인다. 별명인 어우동 역시 “같은 공간에서 어울려 통하다”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어, 색을 밝히는 요부 이미지로 낙인찍어 조롱의 대상으로 삼아 버린 것 아닐까 생각된다. 결국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 어우동은 1480년 10월18일 교형(絞刑·교수형)에 처해져 목숨을 잃고 만다. 간통 사건이 벌어진 지 4개월만 단행된 발빠른 조치다. 어우동의 간통 행적(사진)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女僕)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 속으로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태강수 동이 그것을 알고 곧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서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였는데…(성종실록 122권, 성종 11년 10월 18일)”

◇영화 ‘어우동: 주인없는 꽃’ 스틸컷. 어우동역의 강은비.

하지만 이 기록보다 4년 전(1476년)에 쓰여진 실록에서 어우동을 둘러싼 간통 스캔들이 생겨나게 된, 어이없는 사건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어우동의 남편인 태강수 이동의 패륜이 그 것이다. 결혼 후에도 연경비라는 기생에 빠져 살던 남편 이동이 어우동을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 처럼 모함해 내쫓아 버린 것이 모든 사건의 시작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종부시(宗簿寺·임금 친족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던 관청)가 이 사실을 알아내고 재결합하게 해달라고 청했을 정도였다.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이 여기(女妓) 연경비(燕輕飛)를 매우 사랑하여 그 아내 박씨(朴氏)를 버렸습니다. 대저 종친으로서 첩(妾)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려서 이별하는데, 한편 그 단서가 열리면 폐단의 근원을 막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박씨와 다시 결합하게 하고, 동(仝)의 죄는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성종실록 71권, 성종 7년 9월 5일)” 종부시의 청을 받아들여 성종은 태강수의 고신(告身·임명장)을 몰수하고 다시 결합하라고 명을 내리지만, 이동은 끝내 어우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화 ‘어우동: 주인없는 꽃’ 스틸컷. 태산수 이동역의 백도빈.

이처럼 남편 이동의 계략에 의해 친정으로 쫓겨난 분명한 사정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후에 어우동의 죄를 물을 때는 철저하게 무시된다. 당시 간통죄의 경우 남녀모두 장(杖) 100 대가 일반적이었다. 또 여성의 경우는 관비로 만들거나 유배를 보내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유독 어우동에게 교형을 내린 것은 당시 조선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한다고 해도 과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가 왕족의 부인으로서 유복친(친인척)에 해당하는 종친과 정을 통한 것은 사실상 근친상간에 해당한다는 점과 지거비(知巨非)라는 노비와도 간통을 했다는 사실들이 합해져 간통죄 보다 무거운 형벌이 내려지는 강상죄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결국 어우동의 처벌을 두고 신하들의 논쟁이 격해지기에 이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