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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오감강원]“친절하지 않은 길이지만 걱정마 은하수 별들이 지도가 될 테니까”

(4) 춘천 승호대

강원의 멋은,

계절이 바꾸어 놓는

풍경의 결에서 시작된다.

봄이면 연둣빛 산야가

생명의 숨결을 품고,

여름에는 짙푸른 동해와

청량한 계곡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을이면 황금 들녘과

불타는 단풍이 대지를 물들이고,

겨울에는 설악과 오대산의 설경이

고요한 장관을 이룬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화되고,

멈추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무게는 가벼워진다.

강원의 사계절 정취를 즐기는, ‘

오감강원 - 멋(韻)’이다.

◇은하수가 내려앉은 승호대 야경. 정강주 시민기

춘천 봉화산 아래 좁은 고갯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소양호, 탁트인 절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와 조우하게 된다. 전국의 바이커들에게 유명한, 숨은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승호대(勝湖臺)’가 주인공이다. 그대로 풀이하자면 ‘아름다운 호수를 내려다보는 뛰어난 전망대’라는 뜻을 품고 있는데 그 이름은 소나무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화가 우안 최영식 작가가 지었다고 한다. 그곳에 다다르면 승호대라고 알리는 철제 표지판이 서 있는데, 그 뒤에는 “산첩첩 물겹겹 아름답다 산하여”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 곳에서 바라본 풍경을 어쩌면 이렇게 찰떡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어울린다.

춘천 북산면 부귀리 산자락, 해발 800여m 봉화산 어귀에 자리한 이 작은 터는 여느 유명 전망대처럼 시설이 잘 갖춰진 곳도, 안내판이 친절한 곳도 아니다. 길은 휘어 돌고, 표지판 하나가 도로변에 조용히 서 있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소양호는 멀어지다가도 불쑥 가까워진다. 승호대에 이르는 오솔길은 도심과의 거리보다 시간과 감정의 거리를 더한다. 그 곳에 닿으면 탁 트인 시야 아래로 하늘과 산과 호수가 각각의 색으로 말을 거는 풍경을 만나게 된다.

◇승호대 전경. 강원일보DB

소양호는 이제 마치 땅 속에 깃든 바다처럼 춘천을 품고 있다. 승호대는 그 바다를 가장 넓게, 가장 깊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다. 하늘이 맑은 날이면 호수는 하늘색을 닮고, 흐린 날이면 잿빛 슬픔을 따라 흐른다. 밤이 되면, 인공 불빛 없는 고요 속에 별들이 쏟아진다. 그래서 이곳은 낮의 풍경보다 밤의 침묵으로 더 유명해졌다. 인공 불빛이 거의 없는 이 고요한 고갯마루는,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지는 ‘은하수 맛집’으로 통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소양호의 수면 위로 별빛이 부서지고, 머리 위로는 흐드러지게 은하가 흐른다. 별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들고 오는 사진작가들, 손을 맞잡은 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인들. 모두 별을 보러 왔다가 호수를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지는 곳이다.

풍경은 계절마다 표정을 달리한다. 봄에는 피어오른 안개가 호수를 감싸고, 여름이면 산과 호수의 경계가 녹음으로 녹아든다. 가을 단풍은 하늘의 붉음을 땅에 데려다 놓고, 겨울 눈발은 물과 산과 하늘의 경계를 지운다. 승호대는 ‘무언(無言)의 자리’다. 따로 전망대 시설이 없고, 커피 한 잔을 팔거나 노래를 트는 카페도 없다. 그저 땅과 하늘, 나무와 바람만이 존재한다. 이곳은 침묵으로 당신을 환대하고, 당신이 데려온 이야기 하나쯤 조용히 들어준다. 그래서일까. 관광지가 아니라 마음을 놓고 오는 곳, 혹은 내려놓고 가는 곳이다.

◇승호대 주변 전경.강원일보DB

길가 돌 틈에 핀 풀들이 작은 숨소리로 말을 건다. 철쭉도 아니고, 진달래도 아닌 이름 모를 풀꽃들이 도란도란. 그 옆에서 호수가 미동 없이 내려다보이고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호수는, 어떤 마음도 다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이와 너비다. 그 깊이에는 묻힌 것도 있고, 잊힌 것도 있다. 댐이 생기며 잠긴 마을, 기억에서 지워진 고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풍경. 그 시간들이 이 자리에서 고요히 떠오른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많은 걸 하지 않는다. 많은 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걸 느끼게 된다. 한참을 앉아 있다 보면, 마음속에 쌓여있던 먼지 같은 생각들이 하나둘 가라앉는다. 그리고는 그 바닥에 비친 하늘을 본다. 그렇게 승호대는 호수만 내려다보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비춰보는 거울 같은 곳이다.

승호대가 있는 ‘건봉령(乾烽嶺)’은 이름처럼, 옛날에는 봉화를 올리던 고개였다고 한다.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던 자리에 지금은 별빛이 내려앉는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하늘과 소통하는 자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얼마나 절묘한 전환인가. 승호대의 침묵은 그 자체로 봉화다. 말없이 피워 올리는 풍경의 신호탄. 돌아나오는 길, 누군가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누군가는 조용히 손을 흔든다. 아마도 이곳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시 오게 되는 자리일 것이다. 이름 모를 작은 자리지만, 마음에는 오래 남는다. 춘천 건봉령 승호대, 그곳에는 눈으로 읽고 또 마음으로 보는 풍경이 있다.

오석기기자 / 편집=전윤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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