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에서 나무는 풍경의 일부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로수는 그 존재를 인식하기도 전에 가지가 잘리고, 뿌리가 도려지고, 잎이 쓸려 나간다. 효율적인 관리, 빠른 정비, 균일한 미관. 도심 속 나무는 그렇게 기능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나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도시의 풍경을 구성하는 ‘문화적 장면’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가지치기라는 단순한 작업에 예술가의 감각과 시민의 기억이 더해지면, 나무 한 그루도 도시의 이야기를 품을 수 있다.
보통 가로수 가지치기는 시설관리 부서나 용역업체가 맡는다. 작업은 빠르고 일괄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결과물이 도시의 고유성을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나무가 비슷한 형태로 잘리고, 그 나무가 바라보는 풍경이나, 주변 사람들 과의 관계는 고려되지 않는다. 이때 예술가가 개입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예술가는 나무를 하나의 풍경으로, 도시의 텍스트로 읽는다. 가지를 자르기 전에 그 나무의 형태, 자라는 방향, 계절의 빛, 그늘을 함께 살핀다. 그리고 나무가 위치한 거리와 동네의 특성에 따라 ‘어떻게 자를 것인가’가 결정된다. 가지치기가 하나의 창작 행위가 되는 것이다.
예술가가 구역별로 가로수를 맡는다면, 거리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 된다. 단순히 잘라낸 나무의 가지가 아니라, 나무의 조형미를 살린 ‘살림의 미학’이 드러난다. 잘린 가지는 버려지지 않고, 소형 조형물이나 벤치, 안내 표지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 봄에는 시 구절을, 여름에는 어린이의 그림을, 가을에는 주민의 이야기를 담은 태그를 나무에 매달 수도 있다. 이런 상상력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도시 풍경에 대한 해석과 재구성이다. 나무를
중심으로 주민이 모이고, 예술가가 이야기하고, 거리가 변한다. 가지치기는 곧 ‘문화 활동’이 된다.
예술가가 공공의 영역에 개입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관리’가 우선인 행정은 예측 가능성과 속도를 중시하고, 예술은 해석과 상상력을 중심에 둔다. 하지만 그 둘이 만날 수 있다면, 도시는 훨씬 더 다정하고 창의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춘천이나 강원도처럼 자연과 일상이 가까운 지역에서는 이런 시도가 특히 의미 있다. 예술가는 시민과 행정 사이에서 감각을 번역하는 사람, 도시의 표면을 다양하고 중층적으로 바꾸는 실천자가 될 수 있다.
문화도시는 거창한 사업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서 시작된다. 나무 하나, 골목 하나, 벽 하나를 예술적으로 바라보는 감각. 예술가가 그 감각을 가지고 주민과 함께 실존적 공간을 만드는 도시를 다시 쓴다면, 거기서부터 문화도시는 자라난다.
우리는 이제 도시를 정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도시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 변화의 출발점이 바로 예술가이고, 나무 한 그루가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