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천 팔봉산은 관광 및 민속 부분에 관한 자료는 풍부하지만 역사적 고증 자료는 찿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최근 연구를 통해 팔봉산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산을 간직하고 있음이 밝혀져 수려한 경관을 통한 국민관광지로서만 아니라 역사문화 유산으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팔봉산의 가치가 저평가 되었다는 반증이며 국민관광지로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중요자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연구가 진행되지 않으며 그동안 민속부분에서 정확하지 않은 내용들이 반복적으로 인용 기술되며 조선시대 공식 문헌에 기록된 팔봉산사에 대한 연구 등은 부각되지 않은채 팔봉산이 가진 유구한 역사유산은 도외시 되고 있다. 없는 가치도 만들어 지역 자원화 하는 시대에 공인된 역사자료에 기술된 중요한 가치는 외면한채 잘못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공론이 필요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팔봉산(328.2m)을 거슬갑산·치악산·금강산·오대산·태백산과 더불어 강원도의 명산으로 규정하고 있다. 동국여지지에는 팔봉산을 “가파르고 기이한 바위로 된 8개의 봉이 연이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장 높은 제2봉 바위산 정상부에는 당집(삼부인당)이 위치해 있는데, 당집 주변에서 기와편이 발견되었고,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기의 기와편이었다. 수습된 기와의 시기별 연속성으로 볼 때 건물이 장기간에 걸쳐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와편이 발견된 장소는 1437년 '세종실록'에 기록된 “위판에 팔봉산대왕지신’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대왕’ 두 글자를 삭제할 것”, “사묘가 산 위에 있어서”라는 기록으로 볼 때 여러 문헌에 사묘가 산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팔봉산사로 추정된다. 제2봉에서 수습된 와편을 근거로 팔봉산사는 조선말기인 1893년까지 소재관에 의해 1000년 이상 팔봉산대왕지신 → 팔봉산지신’의 위패를 모신 지방사전이였으며, 홍천현의 수령이 봄, 가을 치제를 드리는 공적 제장이었다.
'세종실록'46권·'세종실록지리지'·'세종실록'76권‧'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하여 조선전기 새롭게 개편, 정비되는 81곳의 산사 중 산사와 치제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곳은 가평 화악산사·임강현 용호산사·홍천현 팔봉산사 단 3곳으로 확인되어 팔봉산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홍천현 팔봉산사에서 모신 산신은 1437년 이전부터 고을의 수호신으로써 대왕이라는 산신으로 신앙되었다는 것이 ‘산천단묘순심별감’보고서에 기록된 '팔봉산대왕지신’으로 확인된다.
이와 연결되어 '신중동국여지승람'의 산천조에 팔봉산이 일명 감물악으로 불리었다는 기록은. 고어(古語)를 연구한 결과에 의해 감물(甘勿)은 대왕·왕을 의미하며, 또한 산사 중 천왕·대왕을 모시는 산사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추정한다는 연구 결과를 보면, 감물악(팔봉산)은 산명 자체가 대왕을 의미하여 삼국시대부터 팔봉산이 대왕으로 신앙 되어 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어 팔봉산사묘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까지 소급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팔봉산에 대해서는 기존의 잘못된 자료들의 재평가와 사묘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연구를 통해 팔봉산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재조명 하고 유구한 역사를 품은 진정한 국민관광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