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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기러기 찬서리 묻은 발가락 배에 붙이고 날 때  

장석주 시인

가을이 온다는 것은 잃었던 식욕이 돌아온다는 뜻이다. 만산홍엽 다 진 뒤 잿빛이 덮은 산과 들에 찬 서리 내릴 때 잠잠하던 식욕이 폭발한다. 외할머니나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해준 온갖 음식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도 이맘때다. 아쉬운 건 두 분 음식을 더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먹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다. 뭔가를 먹을 때 미각의 쾌락을 경험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는 게 따분하다면 먹는 걸 좋아하지 않을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믿는다.

동네 상가에 단골 작은 반찬가게가 있다. 세탁소와 피자집과 빵집 사이에 ‘작은 부엌’이란 반찬가게가 끼여 있다. 문을 열면 이런저런 반찬이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환한 불빛 아래 가지런히 진열된 반찬들은 정갈하고 먹음직스럽다. 예순 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반찬가게를 꾸리는데, 이 아주머니의 손맛이 좋다는 소문이 나서 장사가 잘 되는 편이다. 나는 아주머니 손맛뿐만 아니라 좋은 재료를 쓰고 손님에게 항상 친절한 덕분일 거라고 짐작한다.

정월 보름엔 오곡밥을, 동지엔 동지팥죽을 ‘작은 부엌’에서 사다 먹는다. 여름엔 오이냉국을, 가을엔 아욱국을 사다 먹고, 추석엔 갈비찜, 송편, 잡채, 대구전 따위를 먹는다. 명절 때마다 ‘작은 부엌’에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 까닭은 시간과 수고를 절약할 뿐만 아니라 집에서 만든 음식보다 맛도 좋기 때문이다. ‘작은 부엌’에서 만드는 반찬 가짓수가 많지만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건 고등어 김치찜이다. 김장김치와 고등어를 함께 푹 익혀낸 찜 요리다. 단맛이 배인 가을무도 넓적하게 썰어 넣고 중불에서 익히는데, 무가 물렁해질 때까지 졸여야 간이 골고루 밴다. 김치와 고등어의 조화도 기막히지만 달착지근한 가을무를 씹는 식감도 고등어 김치찜의 풍미를 더한다.

맨밥에는 열 반찬보다 고등어 김치찜 하나면 족하다. 딱히 반찬이 마땅치 않으면 아내에게 연락해 “들어올 때 ‘작은 부엌’에서 고등어 김치찜을 부탁해!”라고 이른다. 뭘 먹고 싶다는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는 아내는 고등어 김치찜을 내려놓으며 “이게 그렇게 맛있어? 자주 먹어도 안 질려?”라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고등어 김치찜을 고급 음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등어 김치찜은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비싸지 않으니 서민 음식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누구나 큰 부담없이 먹을 만한 음식이다.

묵은 김치의 신 맛과 고등어의 무미한 맛은 합이 좋다. 이 음식의 베이스는 김치의 숙성된 맛이다. 김치가 맛없다면 고등어 김치찜이 맛있을 수 없다. 고등어 살은 수분이 적어 퍽퍽한 식감이다. 이 퍽퍽함을 김치의 신맛이 감싸며 어느 정도는 중화시키는 것이다. 고등어 김치찜이 맛있는 건 땅과 바다에서 나온 재료 궁합의 덕이다. 묵은 김치와 큰 멸치 한 줌을 군용깡통 속 돼지 굳은기름, 즉 돈지(豚脂, 월남에 파병된 장병들이 돌아올며 가져온 것이라 했다)를 수저로 듬뿍 떠 넣고 푹 익혀낸 음식과 어른이 되어 먹은 고등어 김치찜 맛이 겹쳐진다. 돼지기름이 녹아 배어 들어 고소하고 신 김치 맛이 얼마나 혀에 감칠 맛나게 달라붙던지! 고등어 김치찜은 밥도둑이다. 미뢰를 자극하는 김치의 깊은 신맛에 이끌려 연신 수저질을 하다보면 밥 한 공기사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임진강 너머 북쪽에서 기러기 떼 찬서리 묻은 발가락 배에 붙이고 날아온다. 가을비 그친 대기는 파랗고 은행나무 아래 길바닥엔 노란 은행잎이 수북하게 쌓였다. ‘작은 부엌’ 아주머니의 고등어 김치찜을 먹을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며 혀 밑에 단침이 괸다. 이것의 맛을 굳이 말하자면 늦가을의 맛이고, 세월의 더께가 만든 맛이다. 분명 어른이 좋아할 만한 맛이다. 어른이란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웬만큼은 겪은 사람들이 아닐까. 따라서 어른의 맛이란 산 세월이 짧으면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긴 세월의 맛일 테다. 날이 쌀쌀해지는 늦가을, 고등어 김치찜을 먹고 나서는 작년보다 더 선량한 사람이 될 것을 조용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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