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동강에 사는 김봉선(56)씨의 일터는 바다 위다. 인천과 단둥을 잇는 여객선을 타고 왕래하며 물건을 사고판 지 어느덧 10년. 코로나19로 5년 넘게 뱃길이 끊겼지만, 배가 다시 뜨자 그는 주저 없이 짐을 꾸렸다. “배가 다시 다닌다고 하니까 마음이 먼저 움직였어요. 그동안 못 나간 시간이 너무 길었거든요.”
김 씨는 원래 무역을 계획했던 사람은 아니다. 젊은 시절엔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회계 부서에서 장부를 정리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생계를 위해 선택한 뱃길은 어느새 그의 삶을 지탱하는 일상이 됐다. “지금 부모님이 동강에 계셔서 앞에 바로 항구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이 길을 택하게 됐어요. 비행기보다 훨씬 편하거든요.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은 꼭 타요. 화요일, 수요일, 금요일…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가족 생각에 불안해서 안 돼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바다는 단순한 항로가 아니라, 가족 곁으로 돌아가기 위한 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다가온다. “돈 벌려고 나가는 거긴 하지만, 결국은 집에 다시 오려고 배를 타는 거죠. 그게 제 삶이에요.” 한때는 북한 신의주까지 오갔다. 스무 살 전후, 해삼과 전복을 사기 위해 배를 타고 국경을 넘던 시절이다. “그때는 신의주가 우리보다 잘살았어요. 과일도 많고, 신발도 좋고… 진짜 가게가 꽉 찼었죠. 지금은 상상이 안 되지만, 그땐 그랬어요.”
김 씨는 산둥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고향은 관전시 하로하다. 어릴 적 조선학교에서 배운 말과 노래는 여전히 몸에 남아 있지만 그 언어를 함께 나눌 사람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나는 중학교까지 조선학교 다녔어요. 그때는 조선어를 다 배웠으니까 지금도 조금은 기억하는데 우리 애들은 다 중국말만 쓰고 조선말을 못 해요. 조선족이어도 세대마다 달라요. 얼마나 아는지가 정말 천차만별이에요. 사람도 줄고, 말도 잊어버리는 거죠.”
요즘 중국의 젊은 세대가 겪는 고민을 묻자 그는 고민없이 답했다. “결혼하는 것도, 애 낳는 것도 다 부담이에요. 한국이나 우리나 다 같아요. 세상이 다 힘들니까요. 앞으로 우리 애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면 그걸로 되는 건데…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예요. 그래서 애들이 돈 걱정없이 공부했으면 하니까 저도 열심히 일 해야죠.”
“나 어릴 땐 노래 정말 좋아했어요. 잘하기도 했고… 그땐 사람들이 내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거든요. 이제는 몸도 그렇고, 목소리도 안 나와요. 노래는 이제 마음속으로만 부르죠.” 가족을 위해 지워놓은 꿈을 말하는 그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 속에는 생계를 위해 뒤로 접어둔 시간들이 쌓여 있었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거 같아요. 힘들어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는 거지요.” 그 말은 단순한 삶의 소회가 아니라, 오랜 시간 국경을 오가며 가족을 부양해온 이의 무게를 그대로 담은 문장이었다.
김 씨에게 인천과 단둥을 잇는 뱃길은 생계의 길이자, 가족으로 이어지는 끈이었다. 삶이 흔려도 다시 오르는 배, 매번 다른 하늘 아래 같은 마음으로 오가는 바다는 그에겐 노동이자 버팀목이었다. 노래 대신 생계를 택한 삶이었지만, 그 리듬은 여전히 단단했고 그 리듬의 끝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었다. 김봉선씨의 하루는 오늘도 국경을 넘어 묵묵히 이어진다. 중국 단둥시=홍예빈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