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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창경바리] 높은다리

김도연 소설가

시골집에서 신작로가 있는 마을로 나가려면 그리 크지 않은 개울을 건너야만 했다. 그곳에 나무다리가 있었다. 통나무로 만든 다릿발이 두 개고 그 위에 대들보와 송판을 깔았는데 난간은 없었다. 그리 멋있는 다리는 아니었다. 중간중간 송판이 떨어져 나간 데가 많아 밤에는 조심해서 건너야만 했다. 실제로 술 취한 동네 아저씨가 떨어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손수레는 지나갈 수 있었는데 경운기는 불가능했다. 마을의 소들도 구멍이 숭숭 뚫려 개울이 내려다보이는 나무다리 앞에 서면 건너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어린 우리들에겐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다리 위에서는 나무를 깎아 만든 칼로 칼싸움을 벌였고 다리 아래에서는 물고기를 잡거나 멱을 감느라 바빴다.

나무다리가 수난을 당하는 계절은 당연히 여름이었다. 장마와 태풍으로 큰물이 나가면 어른들은 수시로 다리 상황을 점검했다. 다리가 떠내려간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떠내려간 다리를 아랫마을에서 찾아온 적도 있었다. 어른들은 다리 양 끝의 대들보에 쇠줄이나 밧줄을 묶어놓거나 상황이 더 위급하면 아예 다릿발에서 분리해 둑으로 끌어올려 놓았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연결했다. 하지만 역시 어린 우리들은 신났다. 흙탕물이 꿈틀거리며 내려가는 다리 이쪽과 저쪽에서 물 구경하느라 바빴다. 어른들이 자릴 비우면 담이 큰 녀석부터 뜀박질해서 다리 건너기 내기를 했으니까. 오줌까지 지리면서도. 어느 해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은 초등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다리가 있는 학생들은 오전 수업만 마치고 돌려보낸 적도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다리가 떠내려가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여름이었다.

한때 이 나라 정치인들의 선거공약 중 하나가 자기가 당선되면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찍어줬건만 나무다리가 철근콘크리트 다리로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우리 마을의 나무다리도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사라졌으니까. 다리의 중요도는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고갯길은 넘어가더라도 물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관동대로의 본격적인 강원도 구간은 횡성, 새말, 전재, 안흥, 문재, 계촌, 여우재, 방림, 대화, 모릿재, 진부, 싸리재, 횡계, 대관령, 강릉이다. 이 길의 곳곳에는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하는 물이 있는데 여름철 물이 불어나면 여행객들은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나무다리가 떠내려갔거나 나룻배가 급류를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가 처음 나타난 일제 강점기 때는 수량이 많은 평창강에 도선장이 두어 개 생겨났다. 신작로를 달려온 차량이 강을 만나면 다리가 없었기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러니까 크든 작든 물을 건너는 게 일 중의 일이었던 시절이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등장인물들도 장마로 다리가 떠내려가서 나귀를 끌고 시린 개울물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관동대로의 진부와 횡계 사이에 싸리재가 있는데 재를 넘기 전 마지막 다리의 이름이 ‘높은다리’다. 재의 북쪽 장군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생겨난 자그마한 다리다. 볼품은 없는데 이름이 왠지 마음에 드는 다리다. 큰물이 나가면 차를 끌고 가끔 방문하는데 옛날엔 다리 근처에 주막도 있었다고 한다. 고갯마루의 중턱에 자리한 다리. 장군바위에서 시작된 물이 빠져나가는 첫 번째 다리인데 내가 자라난 마을을 지나 서해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다리가 있을까. 물과 다리의 그 긴 여정을 생각하면,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나로선 한동안 마음이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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