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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권혁순칼럼]단종이 영월에서 ‘환생’한 이유

지도자는 백성의 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줄 알아야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평범하고도 준엄한 진리 확인

동강의 푸른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영월 청령포, 그곳은 오랫동안 슬픔의 유배지이자 고립된 섬이었다. 서슬 퍼런 칼날 아래 어린 임금이 남긴 피눈물이 서린 곳, 육지 속의 고도(孤島)였던 그 땅이 최근 예사롭지 않은 울림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000만 관객의 마음을 적시며 흥행의 금자탑을 쌓은 것은 단순히 지나간 역사의 재해석을 넘어 이 시대가 갈구하는 ‘진정한 지도자상’에 대한 민초들의 갈증이 투영된 결과다.

영화 속 단종, 아니 이홍위는 왕좌에서 쫓겨난 가련한 소년이기 이전에 마을의 부흥을 위해 스스로 유배지의 보수주인을 자처한 촌장 엄흥도와 살을 부대끼며 인간의 온기를 나누는 존재로 그려진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왜 하필 지금, 560여 년 전의 어린 임금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 이토록 뜨겁게 우리를 흔드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백성의 소리를 가슴으로 듣는 자’만이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하고도 준엄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때마침 들려온 이재명 대통령의 결단은 이러한 영화 속 서사와 묘하게 겹쳐진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자신이 오랫동안 거주해 온 분당의 아파트를 시장에 내놓았다는 소식이다. 누군가는 이를 정무적 판단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야당의 공세를 차단하려는 고육지책이라 한다. 그러나 그 행위의 이면에는 정책의 권위가 ‘말’이 아닌 ‘삶의 일치’에서 나온다는 서늘한 자각이 서려 있다.

“권위를 잃은 정부는 뒤뚱거리는 오리를 넘어 식물이 된다”는 대통령의 토로는 민심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권력의 위태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영월의 거친 산세 속에서 엄흥도가 어린 임금을 품었듯, 국가의 정책 또한 백성의 삶이라는 구체적인 현장을 품어야 한다. 부동산에 묶인 자금을 금융시장으로 돌리겠다는 ‘머니무브’의 방향성이나, 다주택자에게 매각이 유리한 환경을 만들겠다는 공언은 결국 ‘집’이 투기의 수단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에 닿아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솔선수범’의 길을 택한 것은, 정책 결정권자의 진심이 국민의 신뢰라는 옥토(沃土)에 뿌리 내릴 때 비로소 집값 하락 압력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서정(抒情)은 멀리 있지 않다. 정치가 차가운 숫자와 메마른 법령으로만 작동할 때 백성은 소외된다. 하지만 지도자가 자신의 안온한 보금자리를 내놓으며 국민의 고통에 동참하려 할 때, 비로소 정치는 따뜻한 온기를 품은 서사가 된다. 영화 속 단종이 청령포의 적막을 깨고 백성들과 눈을 맞췄듯, 오늘날의 위정자들 역시 여의도의 화려한 조명 아래가 아니라 민초들이 겪는 전세 사기의 공포, 내 집 마련의 좌절, 치솟는 물가라는 현실의 골방으로 걸어 들어와야 한다. 백성의 소리는 바람과 같아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 바람이 모이면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 영월 단종이 다시 세상에 출두한 이유는 명확하다.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와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끼라는 경고이자 격려다.

이제 대통령의 ‘매각’은 하나의 시작이어야 한다. 집을 팔고 금융투자로 눈을 돌리는 것이 개인의 이득을 넘어 국가 경제의 선순환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정책으로 증명해야 한다. 국민은 대통령의 아파트 가격이 얼마에 팔렸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결단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안정시킬지를 지켜보고 있다. 청령포에 밤이 깊으면 소나무 숲 사이로 이름 모를 새들이 운다. 그 울음소리가 그저 슬픈 전설로 남지 않으려면 오늘날의 정치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구체적인 손길이 되어야 한다. 왕이 백성과 살기 위해 유배지로 향했던 영화 속 서사가,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살기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는 현실의 감동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단종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시린 발원이자 가장 뜨거운 당부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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