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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청령포의 숲’ 우리가 지켜낼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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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균 영월소방서장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남긴 여운은 길고 깊다.

육지 속 외로운 섬 청령포에서 엄흥도의 거친 손이 올린 따뜻한 솥밥은 관객의 마음을 적셨고, 소나무 숲의 고요한 숨결은 말로 다하지 못할 위로를 건넸다. 화면을 채운 푸른 숲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며 한 인간의 삶을 품어낸 존재로 다가온다.

청령포의 숲은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견디며 어린 왕의 눈물을 대신 닦아준 또 하나의 이야기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울리는 솔잎 소리는 역사의 기억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건네는 조용한 메시지다. 자연이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와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는 힘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 풍경과 기억이 영원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잠시의 방심이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

매년 봄 반복되는 산불은 건조한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산을 덮친다. 조선의 시간을 간직해온 노송이 무너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나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단종의 슬픔과 외로움, 엄흥도의 온기, 그리고 우리가 느낀 감동까지 함께 사라진다. 남는 것은 잿더미와 상처뿐이다.

산불 예방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다. 작은 불씨 하나를 관리하는 일이 수백 년의 시간을 지키는 일이다. 이는 자연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역사와 기억을 이어가는 일이다.

지금도 청령포의 노송은 그 자리에 서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솔잎은 묻고 있는 듯하다. 이 땅의 시간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말이다.

실천은 거창하지 않다. 산에서 불씨를 남기지 않는 것, 작은 부주의를 줄이는 것, 자연을 지키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작은 행동이 숲을 지키고 결국 우리의 이야기를 지킨다.

청령포의 숲은 아직 남아 있다. 이제 지켜낼 차례는 우리다. 여기에 더해 지역사회와 행정의 역할도 중요하다. 산불 취약 시기에는 입산 통제와 순찰을 강화하고, 주민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예방교육을 지속해야 한다. 문화유산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일수록 관리와 책임은 더 엄격해야 한다.

또한 최근 기후변화로 건조기간이 길어지면서 산불 위험은 더욱 커지고 있다. 작은 불씨 하나가 대형 산불로 번지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는 만큼, 개인의 경각심과 더불어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의 관심과 실천이 모일 때 비로소 청령포의 숲은 다음 세대에도 온전히 이어질 수 있다. 작은 경각심 하나가 큰 재난을 막는 출발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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