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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팔도건축기행]법화사

서귀포시 하원동 1071-1번지에 있는 법화사(法華寺)는 수정사(水精寺)와 함께 제주의 비보사찰(裨補寺刹)이다. 일설에 따르면 건립 시기에 대해 통일신라 말기까지 올라간다.

법화사지(址)는 1971년 제주도기념물 제13호로 정됐고 1982년 이래 수차례 발굴이 진행됐다.

이름 그대로 창건 초기부터 사상적으로 ‘법화경(法華經)’을 근본으로 삼아 발전된 불교사상의 하나인 법화사상에 기초를 두었던 사찰이었다.

법화사 입구

법화사의 창건에 대한 문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9세기 경 장보고가 해상을 지배하고 산둥반도에 법화원(法華院)을 창건했듯이 제주도에 법화사를 창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법화사에서 출토된 중창 명문(銘文) 기와를 근거로 법화사를 청해진과 마찬가지로 장보고 시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1983년 발굴 조사 때 건물터가 발굴됐는데 규모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로 기단 면적이 약 330㎡인 대단히 큰 건물로 추정됐다. 기단의 지대석은 2단이며 면석이 있는 자리에 턱이 있는 것 등은 오래된 특이한 양식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도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로 미뤄 10~12세기 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실제로 제주대학교박물관은 1992년 법화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중요한 하나의 명문기와를 찾아냈다. ‘始重創十六年己卯畢(여중창십육년기묘필)’이라는 명문이 나온 것이다. 다시 이 명문에 대한 해석을 ‘(~년에 중창을 시작해 16년 기묘년에 마쳤다’로 추정하고 ‘16년’을 원 세조의 연호인 ‘지원(至元)’ 16년으로파악했다. 따라서 ‘지원 16년 기묘’ 즉, 고려 충렬왕 5년인 1279년 법화사 중창이 완성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언제 중창이 시작됐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법화사-대웅전

그런데 1997년 제7차 발굴조사에서 또다시 중요한 명문기와가 출토됐다.

‘至元六年己巳始(지원육년기사시)’라 명문은 앞서 1992년 출토된 기와에 명문된 ‘始重創十六年己卯畢’의 앞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분명했다.

명문을 연결하면 ‘始重創十六年己卯畢 至元六年己巳始’란 문장이 된다. 즉, ‘지원 6년 기사년에 중창을 시작, 지원 16년 기묘년에 마쳤다’는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법화사의 중창은 1269년(원종 10년, 지원 6년)에 시작해 1279년(충렬왕 5년, 지원 16년)에 마무리됐다는 것이다.

법화사-법륜상

법화사는 탐라(옛 제주 지명)에 대한 원나라의 지배가 이뤄진 1273년(원종 14년) 이후 원에 의해 크게 중창되는 등 부각되기 시작했다.

법화사는 한때 노비만 280명이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의정부에서 왕에게 아뢰었다. 제주목사에 따르면 제주에 비보사찰 두 곳이 있는데 수정사에는 현재 노비가 130명이 있고 법화사에는 280명이 있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두 사찰의 노비를 다른 사찰의 예에 따라 각각 30명만 주고 그 나머지 382명은 전농(典農)에 부치십시오 하니 왕은 그대로 따랐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노비 수에서만 보더라도 당시 법화사가 거대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법화사도 쇠퇴의 길을 걸었다.

법화사 경내-법화수 발원지

■폐사=조선시대 들어 점차 쇠퇴하던 법화사는 언제 폐사(廢寺)됐을까. 이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 편찬된 문헌으로 당시 이미 없어진 사찰의 경우 ‘今廢寺(금폐사)’라 기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법화사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법화사는 대정현의 동쪽 45리에 있는데~’라는 내용이 수록됐고 ‘금폐사’란 기록이 없다.

효종 4년(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에 의해 편찬된 ‘탐라지’에는 ‘법화사는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지금은 단지 초가암자 몇 칸남 남아있다. 그 서쪽에 물 맛이 좋은 샘이 있는데 절 앞 논에 물을 댄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종합해보면 법화사는 제주에 대한 원의 통치가 이뤄지기 시작한 1273년 이전 언제이가 창건됐고 1279년 원에 의해 중창돼 더욱 교세를 떨쳤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 숭유억불 정책으로 위세가 악회되다 16세기 후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초가 암자 형태로 사찰의 명맥을 유지해 왔지만 18세기 초에는 이마져도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1920년대 후반 안도월선사가 이곳에 포교소를 세우면서 이곳에 다시 불도(佛徒)가 미치기 시작했다. 1947년 제주4·3 당시 중산간 일대에 대한 소개령으로 포교소도 불에 타고 말았다. 한국전쟁때 인근 대정읍에 육군제1훈련소가 세워지면서 군인들의 임시 숙영지로 이용됐다. 당시 대웅전을 숙영지 본부로 사용했고 법화사 경내 논을 메꾸어 연병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법화사-구품연지

 ■주심포 양식 대웅전·구품연지 복원=법화사지는 1982년부터 발굴이 진행됐고 1987년 대웅전이 들어섰다. 발굴 과정에서 조사단은 과거 사찰에 연못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발굴한 결과 불국사 앞의 ‘구품연지’와 유사한 연못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2001년 ‘구품연지(九品蓮池)’가 조성됐고, 2004년 연못 북쪽에 ‘구화루(九華樓)’가 들어섰다.

법화사-구화루

법화사는 현재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쪽에 스님들이 생활하는 ‘서별당’, 동쪽에 종무소로 운영되는 ‘남순당’, 남쪽에 ‘구화루’, 사찰 입구인 동남쪽에 ‘백련당’(사찰 체험 관련 사무공간)으로 조성됐다.

대웅전과 ‘구화루’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지어졌다. 주심포 양식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까지 목조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 기법 중 하나다.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처마를 받치는 부재)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간결하면서도 웅장한 특징을 지닌다. 공포는 처마의 무게를 받쳐 기둥에 전달하고 지붕 하중을 분산하는 역할을 하는 부재로 복잡한 짜임새를 이룬다. 주심포 양식은 건물의 기둥 위에만 공포를 배치하는데 비교적 간결하면서도 곡선적인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법화사도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 창건됐다고 보고 대웅전과 구화루를 지으면서 주심포 양식을 반영했다고 한다.

대웅전은 전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멀리서 바라봐도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구화루 남쪽에 조성된 구품연지는 약 3000여 평 규모로 조성됐다. 서방 극락정토을 모방해 조성됐다고 한다. 국내 사찰 내 조성된 연못 중 최대 규모인 이 연지 가운데는 작은 섬이 조성됐다.

‘구품연지’의 구품(九品)은 크게 상품(上品)·중품(中品)·하품(下品)으로 나뉜다. 상품은 대승불법을 깊이 수행하고 지혜가 높은 자, 중품은 계율을 지키며 선행을 쌓은 일반 불제자, 하품은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참회하고 염불하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자비로운 가르침을 담고 있다.

생전에 닦은 선업(善業)에 따라 왕생 등급이 달라진다는 구품왕생은 정토신앙의 핵심으로 아미타불의 자비와 보살핌에 의지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강조한다.

법화사 종

 ■법화수(法華水)=법화사 경내에서 솟아나는 물로 1985년까지 사찰 아래에 있는 하원마을 주민이 식수원으로 이용했다. 한국전쟁 시 상무대 제3숙영지 본부가 법화사 경내에 들어서면서 절 앞의 논과 밭을 매립해 연병장으로 쓰면서 이 물을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서별당 서북쪽 기슭에서 물이 솟아나는데 주민들의 식수원으로는 활용되지 않고 있다. 법화수가 도랑을 따라 흘러내려 고인 못(池)이 ‘구품연지’로 조성됐다.

법화사 대웅전 내 불상

 글·사진=제주일보 김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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