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어느 소설의 첫 문장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새하얗게 눈이불을 덮은 산세가 거울처럼 호수에 반사되는 수묵화 같은 풍경. 방금 지나온 발자국을 지우며 부지런히 쌓이는 눈에 온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청둥오리 떼가 수면을 박차는 소리 만이 유일한 이곳. 횡성의 진정한 속살, 호수길이다.
횡성 호수길은 2011년 정식 개통한 둘레길이다. 횡성호를 빙 둘러 총 31.5㎞, 6개 코스로 조성됐다. 태기산, 청태산, 칠봉산 등 크고 작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살랑이는 물결을 끼고 걷는 호수길은 계절마다 다채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봄에는 수줍게 틔운 새싹과 꽃을, 여름에는 녹음과 만발하는 생명력을, 가을에는 짤랑이는 단풍잎을 만날 수 있지만, 특별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겨울이 제격이다.
세상을 뒤덮은 함박눈에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풀숲인지 경계가 희미해진 풍경 속에선 호수의 존재감이 새삼 거대하게 다가온다. 호수 테두리를 따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걷다보면, 여정 초반 작은 줄만 알았던 호수가 진심을 내보이듯 시시각각 크기를 키우며 길손을 안내한다. 길 중간중간에는 폐목재로 만들어진 조형물들이 방향을 가리키고, 때론 쉬고 가라며 자리를 내준다. 사랑하는 가족, 지인과 사진을 남기며 걸음을 옮기다 보면 눈 속에서도 '가족길' 1시간 남짓 코스가 결코 길지 않다. 내리는 눈에 젖어가는 머리쯤이야, 웃음이 만발하는 수다를 막을 수 없다.
횡성호는 2000년 횡성댐이 완공하며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댐을 막고 물이 차오르며 부동리, 중금리, 화전리, 구방리, 포동리 등 횡성군 갑천면 5개 마을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그 자리는 횡성호가 됐다. 사라진 마을과 수몰민들의 애환이 담긴 장소이기 때문일까.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짙푸른 호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십미터 아래 잠겨있을 집과 보금자리를 그려보게 된다. 횡성호 바닥에는 주민들이 횡성장에 나가기 위해 지나던 길이 남아있다고 한다. 차오른 물과 함께 수몰된 주민들의 전통을 기억하기 위해 호수길에는 봇짐을 이고 지게를 진 모양의 '장터 가는 가족' 조형물이 서있다.
횡성 호수길에는 걷는 이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놓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다. 길손은 호수길을 걸으며 어느 순간 수묵화 속을, 또 다른 순간엔 사라진 수면 아래 마을을 다녀오게 된다. 이 겨울 호수길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드넓은 호수가 있고 호수 안에는 생명들이 지저귀며 땅 위에는 내년에 움 틀 새싹을 품고 있는 풀과 나무들이 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모든 어지러운 것들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감싸는 눈 쌓인 풍경도 기다릴지 모른다. 새하얀 눈길을 뽀드득 밟아가며 호수를 눈에 품는 건 어쩌면 특권일지도 모른다. 지친 현실에서 벗어나 특별한 경험을 원한다면, 옷섶을 단단히 여미고 횡성 호수길을 거닐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