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고의 요부로 꼽히는 여인들과 김개시(金介屎)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김개시는 스스로 권력의 중심이었다. 다른 인물들이 왕의 추상같은 권위에 기대어 권력을 휘둘렀다면 그는 왕을 만들어낸 것은 물론 간신과 결탁,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사람에 대한 충성과 의리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하루 아침에라도 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이었다. 김개시는 권력에 기생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고 했다. ‘연려실기술’ 등 역사서에는 그의 위세가 광해군을 넘어섰다는 기록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을묘년(1615년) 때에는 관리 임명 과정에서 뇌물이 성행해 모든 관직의 가격이 정해졌다.…매번 인사 때 마다 김상궁(金尙宮)은 (뇌물을 받고)자신의 뜻대로 인사 명단을 작성(執筆)했으며 왕조차도 이를 막지 못했다.(연려실기술 21권·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광해군의 난정’편)”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선조는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줄행랑을 치기 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리고 분조(分朝·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통해 광해군에게 전란의 수습을 맡긴다. 그때 광해군의 나이가 지금의 고등학교 2학년생 나이인 열여덟 살이었다. 전장을 누비며 혼란 수습에 나선 광해군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영웅으로 칭송 받게된다. 어느 누구도 그가 다음 왕위를 물려받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선조의 생각은 달랐다. 선조는 자신이 적장자가 아닌 후궁의 아들, 즉 서얼의 위치에서 왕이 됐다는 컴플렉스를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선조는 전란 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자’도 ‘장자’도 아닌 광해군의 애매한 위치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마침내 1606년에 이르러 계비 인목대비가 적자 ‘이의(영창대군)’을 출산하자, 후계구도는 급격하게 영창대군 쪽으로 기운다. 선조와 서인을 등에 업은 인목대비,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따르는 대북파의 대립이 이어진다.
하지만 선조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권력의 방향타는 광해군 쪽을 향하기 시작한다. 이 때 김개시는 광해군 편에 서서 정치적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 1608년 결국 선조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왕위를 광해군에게 넘기긴다는 선위(禪位·임금의 자리를 물려줌)교서를 내린다. 이러한 내용은 반대세력의 방해로 즉시 전달되지 않았고 김개시에 의해 광해군에게 전해진다. “선왕께서 승하 하시던 날 김상궁(金尙宮)이 신과 이덕장(李德章)을 불러 종이 한 장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유서(遺書)이니 밖에 전하라.’고 하기에…(광해군일기[중초본] 66권, 광해 5년 5월 15일·사진)” 이제 두 살이 된 영창대군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 인목대비도 이러한 상황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김개시는 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광해군의 잠재적인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세우기 시작한다. 광해군을 폭군으로 이끌고, ‘폐모살제(廢母殺弟·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를 행한 폐륜아로 만든 배후에 바로 김개시가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