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월요칼럼]가을, 대관령에 가다

김흥술 전 오죽헌시립박물관장

예부터 고을마다 들고 나는 관문이 있었다. 대관령은 강릉의 진산이며 관문이다. 남북으로 이어진 한반도의 등척을 이루는 태백준령을 동서로 가르는 고개마루이다. 강릉을 지켜주는 산이라고 강릉 사람들은 알고 있다. 대관령을 신성한 공간으로 바라보는 정서가 반영되어 있는 생활사의 관문이기도 하다. 영동과 영서, 중앙과 지방을 단절하기도 연결하기도 했었던 닫힘과 열림의 이중적 특성을 지닌 곳이다.

신라 천 년 동안 강릉의 제일 관문은 안목항이었다고 한다. 지역민이 젠주(前州)라고 부르는 것은 고을의 앞이라는 의미 즉 제일의 관문이었음을 시사한다. 신라의 중앙 경주와는 해상교통로를 중심으로 구축되었고 강릉의 출발지는 남대천이 바다와 닿은 안목항이었다. 안목은 신라 천 년 동안 강릉지역의 제일 관문의 위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항만과 가까운 거리에 한송사, 한송정이 자리하여 당시 문화를 짐작하게 한다. 지역을 찾았던 수많은 화랑 묵객들은 이 유적을 주목하였는데 이는 신라 천 년의 영화와 문화에 대한 향수였을 것이다.

고려개국 시 명주호족이 지방사회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선종불교가 들어오면서 새 지도이념이 구현되어, 개성 중심의 새로운 정치세력과 연대가 추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총체적으로 대관령이 명주호족의 제일 관문으로 비중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신라 이후 고려가 건국되고 중앙이 개성에 정립되면서 강릉 제일의 관문은 대관령이 되었다. 한반도의 서북 개성에 중앙세력이 위치하면서 중앙 정부와 연결을 위해 강릉지역에서는 육상교통로가 새롭게 구축되어야 했고, 그 출발지는 대관령이었다.

이 시기에 강릉지역의 명주호족은 새 중앙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사적 출병을 하였고, 왕실과 정략적인 결혼을 통해 세력연대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정에 출사하고 중앙으로부터 사성을 받기도 하였다. 명주호족의 모든 정치적 활동은 개성에 자리잡은 새로운 중앙정부와 연대를 도모하여 유대를 강화하여, 자신과 지역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한 정치활동이었다. 정치활동의 비중에 따라 대관령은 관문으로의 기능도 변화하였다.

이 시기 대관령을 진산으로 바라보는 강릉 사람들의 원초적 의식과 제일 관문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대관령에는 명주호족의 치제공간으로서, 강릉단오제의 주신격인 대관령국사성황이 평상시 연중 머무는 대관령국사성황사가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매년 강릉단오제에 앞서 대관령국사성황제가 봉행된다. 보현산이라 일컬었던 대관령 북쪽 산자락에 고찰 보현사가 있다. 가파르고 험한 대관령을 넘나들던 이곳 사람들에게 사찰은 쉼터였다. 옛길의 중간 길목에 이 사찰이 있다. 사찰의 연기설화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돌배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 두 보살은 동해안 바닷가에 문수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현보살은 활시위를 당겨 화살이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절을 지어 나갈 것이라 하였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보현사이다.

연기설화는 보현사가 고대사회에서 건립되었지만, 강릉지역의 사회변화를 방증하는 의미에서 신라말 고려 초의 시기로 생각된다. 이러한 양상은 930년에 보현사 지장선원이 건립된 데서 살필 수 있다. 지장선원은 모든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지장신앙을 구현하는 도량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지장선원은 낭원 대사가 주석하였으며, 낭원은 명주호족의 후원을 받았다. 명주호족은 지역의 선도세력이었다. 지장선원의 개원은 낭원이 지도하는 사문과 명주호족의 지역사회가 결속한 사회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대관령은 국가문화유산 명승으로 궁궐 기둥으로 쓰일법한 아름드리 적송 숲을 이루고 있다. 영동지역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품은 대관령에는 대관령국사성황사, 대관령박물관, 보현사, 보현산성 등의 대관령 유산이 있다. 가을에 가보기에 참 좋은 곳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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