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후기 옹기 생산의 확대와 저변화라는 현상에는 천주교와의 관련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후기 이후, 옹기를 만드는 옹기점에는 천주교인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불어났는데, 이는 천주교의 박해와 연관하여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천주교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많은 사람이 산간벽지로 피신하였다. 그것은 이미 정조 말년에 시작되었고, 순조 1년의 신유박해(1801년)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때에 천주교인들은 주로 강원도와 경상도로 피신하였다.
본인이 강원도 영북 수복지구(속초, 양양, 고성)의 도자기와 옹기 가마터 실태를 조사한 결과 속초, 양양, 고성 등 영북 수복지구의 도자기 요지는 2군데이며 옹기 가마터는 6군데에 이른다. 도자기 요지(窯址)로는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 사기막골과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사기장골 두 곳이 있었고 설악산 달마봉 부근에 있었다고 알려진 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옹기 가마터는 속초시 도문동 상도문 2리 설악로 352를 비롯해 양양군 서면 범부리, 현북면 말곡리 명지골, 고성군 토성면 학야 2리 옹기점, 거진읍 용하리, 산북리 산두골 등 6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문화적 가치로 주목을 끄는 곳은 도원 2리 사기막골 요지로 선사시대의 무문, 빗살문토기부터 청자, 백자 편(片)까지 출토돼 장구한 세월 동해안 지역의 도자기 생산 기지 구실을 했었음을 보여준다. 이 곳 도자기는 이조시대 백자까지 생산해 낸 후 장기간 맥이 끊겨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도공들이 모두 일본에 끌려간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당시 이곳은 고성과 인제를 잇는 샛령(間嶺)으로 국도(國道)였고 도원리 사기막골은 그 국도변에 접해 있어 도자기 제작과 운송이 원활했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샛령은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에서 인제군 용대리 창바위로 넘나들던 당시의 유일한 영동, 영북지역 국도로서, 샛령 정상에는 마장터(당시 말을 쉬게 하고 거래하던 곳)가 현재에도 남아 있다. 어성전 사기막골 요지는 백자 주발 같은 식기류가 주로 출토된 점을 미루어 영북지역 일원의 생활용기를 공급하는 소규모의 도요지(陶窯址)로 보인다.
영북지역 옹기(甕器)가마의 역사는 대원군의 병인년(丙寅年) 천주교 박해가 시발점이다.
속초시 설악동 도문 2리의 경우 당시 천주교인 색출 조직인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신분 노출이 우려돼 피신해온 오춘영(吳春泳), 하영(夏泳), 우영(禹泳) 3형제에 의해 시작됐다. 이들 형제의 부친인 오광선(吳光善)씨가 강릉에서 신분이 노출돼 순교하게 되자 이곳으로 피해와 옹기를 굽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날 도문 2리에는 이들의 후손인 오세길(70)씨가 생존해 있어 과거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야리 옹기점마을은 비슷한 시기에 봉화 정(鄭)씨 가솔들이 스며들어 생계 수단으로 시작했다. 이곳 옹기는 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공급이 유지됐으나 1970년대 산업화 과정의 플라스틱, 양은에 밀린데다 입산통제로 화목(火木) 조달이 어려워 사라지게 됐다.
젊은 시절 옹기 가마를 운영하였다는 옹기점 마을의 마지막 도공 김시영(是榮·75)씨는 “수천년 우리네의 살림 도구였던 옹기의 맥이 끊긴 것은 혼을 잃은 것 같이 서운하다”고 아쉬워했다.
강원 영북 수복지구(속초, 양양, 고성)의 도자기와 옹기가마는 시대를 넘나들며 매우 활발하고 끈기 있게 전개되어 왔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옛 도요지 분포도에 영동지역의 도자기 기록이 미흡했던 큰 이유는 자연이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부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고, 열악한 소비성 때문에 도자기 제작이 계속 이어지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오늘날 문화의 주체성 확립을 위해 그 뿌리에 더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는 이때 영동 북부 지역의 도자기문화도 시대적 흐름에 맞게 재조명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조무호 석봉도자기미술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