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모바일 구독자 280만
칼럼

[강원포럼]새희망·새각오로 다시 한 번 달리자

요즘 자주 새벽에 잠을 깨곤 한다. 1955년 을미생, 이제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아 '꼼짝없이 환갑'이 되고 보니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하긴, 지나온 60년 삶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볼 시기도 되긴 되었다. 한데, 생각은 꼬리를 물고 더 나아간다. 100세 시대라 하는데 적어도 20년 정도는 더 산다고 하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결국, 잠 꼬리는 더욱 멀어진다. 특히, 나이 먹는 일이 당황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점점 마음의 나이와 몸의 나이가 일치하지 않게 된다는 데 있다. 마음은 공직을 시작하던 청신한 시절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그렇지 못하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기대치도 몸의 나이에 맞춰져 있다. 몸이 위치한 자리, 그 자리가 지닌 무게, 즉 책임감도 나이에 비례하여 무거워진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순수했던 어느 시절의 모습을 속 깊이 묻고 있다. 누구나 마음속에 연하디 연한 고갱이를 품고 산다. 그것은 한없이 연약하지만 '나'를 이루는 중심이자 삶의 강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요즘 격변의 현대사를 맨몸으로 헤쳐온 아버지 세대 이야기로 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에도 그러한 삶의 고갱이가 잘 그려져 있다.

국제시장 구두닦이와 막노동으로, 파독 광부로, 월남 전쟁터로,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한 주인공. 그 희생의 삶은 60년 전 긴박한 흥남부두에서 아버지와 헤어지며 약속한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함이었다. 말미에서 영정사진 속 아버지에게 “근데 진짜 힘들었다”며 눈물을 흘리는 순간, 노년의 주인공은 소년의 모습으로 변하고, 영정 속 아버지가 나타나 다정히 안아준다.

겉보기엔 강인하고 완고한 칠순의 가장이지만, 놀랍게도 그 속엔 한없이 여린 열 살배기 소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움을 속으로 삼키며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분투해 온, 그리하여 그만하면 잘 살았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위로받고 싶어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 이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 세대를 지탱해 준 참고갱이의 모습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삶의 요체를 훼손당하지 않고 소중히 존중하며 사는 것은 일면 존엄성의 문제이기도 하고, 진정 성공한 삶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최근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갑을(甲乙) 논란'이나, '미생 신드롬'도 맥락을 같이한다. 여전히 을과 미생이 절대 다수인 현실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뒤척이다 동틀 무렵, 문득 다산 선생의 말씀 한마디가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준다. '가슴속에 언제나 한 마리 가을 매가 하늘을 박차고 오르는 기상을 품어라. 눈은 건곤(乾坤)을 작게 보고, 손바닥은 우주를 가볍게 보라'. 선생께서 아들 학유에게 하신 말씀이다. 더불어, 40년 전 공직을 시작하던 때 품었던 마음, 환갑을 맞이한 지금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내 삶의 고갱이이기도 하다. 잊고 있었던가.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직 꿈 많은 청춘이다. 아직 살 날도, 할 일도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밝아오는 이 아침이 내 남은 날들 중에 가장 젊은 날이라는 것이다. 새해 새 각오를 적은 새 수첩을 꺼내어 본다. 창밖으로 잔설 덮인 대관령 능선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이고 늠연히 서 있다.

최명희 도시장·군수협의회장 강릉시장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