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서 예비군 훈련 받다
운명처럼 작사가 길에 발 들여
1,300대1 뚫은 대표곡은
철학적 의미 담은 '천년바위'
잊고 있던 '풍문으로 들었소' 히트는
죽은 자식 살아와 효도하는 기분
조용필 '상처', 유미리 '젊음의 노트' 등
수많은 히트곡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강남스타일'과 견줄 만한
대박 하나 만드는 게 마지막 꿈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풍문으로 들었소'와 박정식의 '천년바위',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 그리고 조용필의 '상처'. 이 노래가 갖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작사가가 한 사람이다. 바로 장경수(66)씨가 그 주인공.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그가 속초 출신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새해에 한번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는 잊고 있었다.
며칠 전 TV에서 흘러나온 한 예능프로그램의 귀에 익은 시그널 음악으로 그를 다시 떠올렸고 내친김에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사는 곳이 경기도 가평군의 한 시골마을이란다. 이내 그가 사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러고 보니 동네가 '아침고요수목원'이 있는 곳이다. 둘러보니 지천에 예쁜 카페가 널렸다. 그중 언덕배기에 있는 장경수씨의 단골 카페를 찾았다. 인터뷰에서 늘 하는 호구조사 시작.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흐름이 끊긴다. 참 기구하다. 어린 시절 속초에 대한 기억을 묻는 질문 끝에 나온 그의 답변에 그런 느낌이 불쑥 올라왔다.
“어머니는 6·25전쟁 때 저를 출산하시면서 하혈이 너무 심해 병원을 찾아다니다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도 얼마 안 있어 돌아가시고. 아기가 젖을 먹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자식이 없는 아버지 선배 되시는 분이 저를 데려다 길렀죠.” 고맙게도 그를 키우기 위해 유모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아버지는 유모와 새살림을 차렸고, 결국 그는 애를 못 낳던 양어머니와 함께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그 어머니를 따라 다녔어요. 물건을 떼다 파는 보따리 장사를 하셨는데. 2~3개월치 식량값을 주고 장사를 떠나시면 그 동네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또 장사가 잘 안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생활을 반복했죠. 절에 맡겨지기도 하고요.”
그의 삶은 고단했다. 듣는 사람도 짠한데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은 의외로 무덤덤하다.
이제 주제 전환이 필요한 시간. 불쑥 '시'와 '가사'는 뭐가 다르냐고 물었다. 결혼에 비유한 그의 표현이 재밌다. “순수시는 태어날 때 부터 멜로디라는 동반자와 결혼을 해도 되고 독신으로 살아도 되는 특권이 있어요. 하지만 대중시(가사)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멜로디라는 동반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전제 조건이 있어요. 시는 시인이 풀어가는 글이지만 작사는 작곡자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가수의 음색이나 음역, 발음 등을 두루 살펴야 하니 더 어렵죠.”
그가 작사가가 된 것은 이태원에서 자취를 시작하고 이태원의 한 초교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는데 한 20명 정도가 따로 앉아서 '짤짤이'를 하더라고요. 화가 나서 가까이 가보니 그 친구들 모두 혼혈아더군요. 나중에는 친하게 됐죠. 함중아씨도 그때 알게 됐어요. 제 옆집에 '신중현과 더맨'에서 드럼을 치던 남철진씨가 살았는데 제가 글을 쓴다고 소개하니 작곡가를 소개시켜 줄 테니 작사를 해보라고 권유를 하더군요.”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그는 운명처럼 작사가의 길에 발을 들인다. '윤수일과 솜사탕'의 리더로 있는 함중아씨의 친형 함정필 작곡가를 만나 본격적으로 가사를 쓰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그의 데뷔작인 '꿈이였나 봐'다. 1977년의 일이다. 그렇게 작사가로 데뷔한 장 작가는 그 후 44년간 1,300여곡은 족히 작사한 것 같다고 밝혔다.
장 작가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곡에 대해 물었다. 1,300대1의 경쟁률을 뚫은 곡이 궁금했다. “얼마 전까지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데뷔작인 '꿈이였나 봐'를 꼽았어요. 데뷔작은 첫사랑 같이 애잔함과 추억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대표작 하면 '천년바위'를 말합니다. 나 스스로를 바위라고 생각하고, 바위가 나라면 무슨 마음을 가졌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만든 곡입니다.”
히트곡이 많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그 중에서도 2011년에 나온 영화 '범죄와의 전쟁' 삽입곡 '풍문으로 들었소' 얘기가 귀에 쏙 들어왔다. “당시에는 히트가 안 됐어요. 저도 잊고 노래를 부른 함중아씨도 잊고 다 잊어버렸죠. 그런데 어느 날 영화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이 곡을 영화에 삽입하고 싶다고. 저작인격권을 얼마 지불해야 하냐고 묻길래 너무 고마워서 안 받겠다고 했죠.”
그는 저작인격권을 포기하는 대신 당시 인디밴드로 인기있던 '장기하와 얼굴들'이 이 곡을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장 작가는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와서 효도를 하는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 후로도 이 곡의 '승승장구'는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대형 영화사에서 영화 주제가로 '풍문으로 들었소'를 쓰겠다고 해서 얼마 전 계약을 했어요. 중국이니깐 이번에는 돈을 받았죠. 얼큰(?)하게.”
1986년 강변가요제 대상곡인 '젊음의 노트'는 그의 예상이 적중한 경우다. “강변가요제 1984년 대상곡 'J에게'는 듀엣에 슬로, 1985년 대상곡 '그대 먼 곳에' 또한 듀엣에 슬로. 그럼 1986년에도 분명 슬로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역발상으로 빠른 곡을 하기로 했죠. 사랑 얘기로 가지 말자고 결정하고 노트에 새 인생을 써내려 간다는 의미로 가사를 쓰게 됐습니다.”
최진희가 부른 '꼬마인형'은 서울에 처음와 자취할 때 함께 살던 선배가 늦결혼을 하고 군대에 입대한 이야기를 풀어 쓴 것이다. 그는 이 얘기를 하면서 작사가가 되려는 사람은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 들어 간접 체험의 폭을 넓히고 자신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없애라고 조언했다. 그래야 매번 새로운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새해 성인가요계가 활성화돼 가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홈런(?)도 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개인적으로 저의 마지막 꿈은 1970년대 돌아와요 부산항에, 1990년대 난 알아요, 2000년대 강남스타일 정도하고 견줄수 있는 그런 대박 하나 만드는 게 꿈입니다.”
이미 많이 쓰지 않았냐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냥 안타 정도였죠. 저는 홈런을 치고 싶다는 겁니다(웃음).”
오석기기자 sgtoh@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