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농민전쟁이 홍천지역에서 어떻게 전개됐으며, 홍천과의 연관성과 그 의미는 무엇일까? 동학은 강원도, 충북 제천과 청주의 세력과 연대해 정선, 평창, 영월, 원주를 축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반면 홍천에서는 넓은 면적과 험준한 산림지역을 이용해 단독 투쟁을 진행하면서 강원도 동학농민전쟁사에 큰 중심을 이룬다.
'홍천군지'에 따르면 도내 동학농민전쟁은 홍천군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다. 홍천 장야촌에서 동학군 30여명을 포살하고 서석면에 1,000여명의 의병이 집결했다고 당시 관군토벌대 소속 맹영재의 보고를 예로 들고 있다. 갑오년(1894년)은 갑오개혁,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이 동시에 일어난 해다. 이 시기 일부 관리는 그 지역의 곡창지대나 물물교환이 활발한 곳에서 전세·역·환곡 등의 방법으로 백성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강원도 농민군의 대접주(지역 대표자 칭호)인 차기석과 홍천접주인 심상현이 갑오년 10월13일 홍천 내촌면 물걸리 동창 등을 습격하고 불사르게 된다.
홍천군 내촌면은 순국8열사 등 만세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기미만세공원이 조성된 애국충절의 고장이다. '광여도'의 홍천현 지도에 따르면 중앙에 창(倉), 인제군 경계 부근에 동창(東倉), 팔봉산의 홍천강변을 끼고 서창(西倉)이 표시되고 있어 과거 홍천현(洪川縣)의 중요 물류 거점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이웃 관군과 연합한 맹영재 부대는 화촌면 장야촌을 지나 서석면 풍암리로 진격하며 농민군은 큰 피해를 입는다. 이곳에서 살아남은 차기석은 내면 창촌에서 유격전을 펼치던 중 11월 하순 내면 광원리 원당에서 붙잡혀 농민항쟁은 종료된다. 당시 홍천의 동학농민군은 내촌면 물걸리에 진영을 뒀으며,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 등 홍천읍, 동면 속초리 등 전 지역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동학농민군의 활동상은 홍천지역의 대표적인 정신적 승리로 기록된다.
동학은 인내천 평등사상과 보국안민의 구체화로 근대화 과제를 실천하고 민의 정치주체의 자각과 대내외적 정치적 평등 기반을 모색했다. 홍천의 동학정신은 1919년 4월에 시작된 기미만세운동으로 표출됐다. 기미만세운동은 4월1일 홍천읍·동면·북방면 지역과 4월3일 내촌면 물걸리 등 각지에서 발생됐다. 이러한 민중 결집의 만세운동의 결기는 결국 지난 동학농민군 항전지로서 장렬하게 산화했던 지역 경험과 굳건하게 확립된 보국안민 정신의 발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