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월 남옥은 1722년(경종 2년)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자는 시온, 호는 추월(秋月)이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 거주지가 춘천으로 나온다. 1753년(영조 29년·31세)에 계유정시문과(癸酉庭試文科)에 병과 4등으로 합격했다. 1763년(영조 39년·41세) 8월3일 계미년 일본통신사행의 제술관으로 떠났다가 이듬해 7월8일에 복명(復命)했다. 그 공으로 1764년 수안군수(遂安郡守)에 임명됐다. 1770년(영조 46년·48세)에 최익남(崔益男)의 옥사(사도세자의 묘사(墓祠))때 이봉환(李鳳煥) 등과 투옥돼 5일 만에 물고돼 현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삼한골)에 안장됐다.
현재 남옥의 문집은 ‘일관시초'와 ‘일관창수', ‘일관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1년간의 일본통신사로서의 여정을 기록한 문집이다. 그중 한시가 무려 2,000수에 달한다. 이는 춘천지역 출신으로 문과에 합격한 인물로서는 최고로 파악된다. 또 18세기 한국 한시사(漢詩史)에 ‘椒林八才士'(초림팔재사)라 불리며 문명을 중앙에 알린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 책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소장 경위는 “1927년 6월에 조선사편수회의 도엽암길(稻葉岩吉)이 춘천부 신북면에 살고 있는 남옥의 6대손인 남상학(南相鶴·강원도평의원)씨를 찾아가 이들 책을 빌려왔다”고 했다.
필자는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 있는 남옥의 묘소를 방문, 2기의 묘소를 찾았다. 첫째 부인인 진주 유씨와 남옥의 합장묘가 위쪽에 자리를 잡고 아래에는 둘째 부인인 창원황씨의 묘가 있었다. 한 능선을 넘어 남옥의 아들인 려(?)의 무덤이 있는데 상석과 망주석이 잘 보존돼 있다. 남옥의 묘는 청평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남옥은 1764년 일본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춘천 소양강변에 추월정을 짓고 만년 계획을 ‘일관시초'에 담았다.
춘천의 문맥(文脈)에서 남옥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조선시대 외교관으로서 방대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춘천지역에서는 실명조차도 잊힌 상태이며, 연구조차도 없다. 춘천 신북 삼한골 내에는 ‘숲체험장'이 건립돼 개장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남옥의 묘가 그곳에 있다. 필자는 춘천시와 산림청 관계자에게 ‘숲체험장' 내에 남옥과 관련된 산책로를 만들어 주고, ‘추월정'을 건립해 시민들 속에 남옥이 회자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