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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1940년대 ‘신의주학생의거’ ‘독도 오폭’ 전국 특종 주목

[창간특집/ 강원도를 기록하다-강원일보의 그때 그 장면 ①1945~1949년]
강원도 최초 필화사건·김우종 사장 피격사건 등 정론직필 과정서 많은 일도

강원일보의 역사는 곧 강원도의 역사이다. 1945년 창간된 강원일보의 보도 내용이 모두 강원도의 근·현대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원일보는 ‘지역개발 우선’, ‘사회정의 실현’, ‘향토문화 창달’이라는 사시가 말해 주듯, 창간 이후 역사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작업을 정론직필의 자세로 쉼없이 이어왔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던 영국 역사학자 ‘E. H. 카’의 말대로라면, 강원일보는 강원도의 과거와 대한민국의 현재를 끊임없이 연결하며 대화를 해 온 셈이다.

오늘, 지난 77년간 강원도와 대한민국의 순간순간을 정리해왔던 강원일보가 그 역사의 흔적들을 지면에 펼쳐놓는다. 과거를 돌아보고 다시 오늘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강원일보에 나타난 강원도와 대한민국의 역사 속 그날을 기획 보도한다.

(1)1945~1949년

■8·15 광복=강원일보는1945년 광복과 함께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문화부에서 독립한 순수 민간단체인 문화동지회의 노력으로 창간한 정론지다. 독립으로 나라는 되찾았지만 일제강점기 36년간 빼앗긴 말과 글을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문화동지회 중심멤버들은 문맹퇴치, 한글보급을 기치로 내세운 민중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신문형태를 갖춘 강원일보의 전신 ‘팽오통신(彭吳通信)’의 창간을 추진하게 됐다. 통신을 먼저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은 해방공간에서 당장 일간신문을 발행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판단, 우선 발행이 쉬운 ‘통신’을 발행하고 이를 모체로 일간신문으로 발전 시키자는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옛 춘천 중앙교회에 사무실을 마련한 문화동지회는 1945년 10월24일 팽오통신 1호를 발행하게 된다. 그것이 강원도 최초의 일간지의 시작이었다. ‘독립’이 강원일보를 태동시킨 역사적인 사건인 셈이다.

■신의주 학생의거=강원일보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1945년 11월23일 신의주에서 일어난 ‘신의주 학생의거’를 특종 보도하면서다. 강원일보가 최초 보도하면서 전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된 사건이다. ‘신의주 학생의거’는 광복이후 38선 이북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정의 학정과 만행에 분노해 반소·반공운동이 퍼져있던 당시 신의주에서 열린 군중대회가 공산당 규탄대회로 변하면서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 소식이 신의주 학생들에게 알려지면서 일어난 분연히 일어난 의거였다. 학생들의 시가행진에 소련군은 전차와 비행기까지 동원해 발포하면서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이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지역지인 강원일보가 중앙지라고 불리는 전국지에 앞서 유일하게 대서특필했다는 것은 한국 신문사에 있어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강원일보의 취재력과 정보력이 당시에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독도 오폭사건=미군정 시기인 1948년 6월8일 독도 인근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미공군이 독도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을 오폭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것이다. 미군기가 훈련 중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해 연습폭격을 했다는 것이 미군정이 발표였지만 피해는 극심했다. 이 사건의 최초 특종보도를 한 곳이 바로 강원일보다. 당시 이 사실을 최초 보도하면서 그야말로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강원일보 보도 이후 계약사인 합동통신에 이를 송신하면서 전국지에 이 내용이 실리게 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 당국은 강원일보를 포고령 위반으로 압박했고, 기사취소, 보도경위 추궁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미군정은 독도사건 유가족에 배상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고, 피해액과 어선 승선원 명단 등을 강원일보에 게재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공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망·실종자는 200명 내외로 추산됐다.

1948년 독도 오폭사건 관련 기사

■강원도 최초 필화(筆禍)사건 =강원도 언론사에 남겨진 최초의 필화사건이 1948년 강원일보 기사를 통해 발생한다. 강원일보는 놋그릇 방매(放賣·물건을 내놓고 팖)사건 보도가 그것. 일제가 강제 수탈한 놋그릇을 광복 후 회수 대리인이 마치 사유물인 것 처럼 비싼 값으로 방매한 것이 부당하다고 폭로한 기사를 게재한다.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강제 수탈한 놋그릇은 당연히 원주인에게 돌여줘야 한다는 것이 기사의 내용이었다. 그러자 회수대리인 정모씨는 신문사에 찾아와 기사취소를 요청했지만, 거절하고 오히려 또다시 보도해 이를 시정시켰다. 이외에도 권총 입수 미수 보도와 가십기사인 ‘전자탄’을 내용을 보고 춘천 중학생 200명이 신문사에 몰려온 일이나 요정 폭행 사건을 비꼰 내용으로 인해 요정 여주인이 편집국에서 며칠 난동을 부린 사건도 필화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김우종 강원일보사장 피격=1949년 1월5일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이 발효되면서 강원일보는 연일 반민특위 활동과 관련된 기사를 게재했다.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제2의 이완용’을 색출 처단하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3월18일자 “본도 반민자 드디어 단죄대에! 본도 반민특위 활동 개시” 등으로 표현했고 도지사와의 1문 1답, 반민법 체포 수행기 등의 기사를 쏟아냈다. 당시 김우종 강원일보 사장은 반민특위 강원도지부장 겸 조사부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강경한 논조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우종 사장은 반민특위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던 중 호위경관으로부터 피습을 당한다. 총상을 입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1주일 정도의 치료가 요구되는 상해를 입는데 그친다. 충격적인 사건에 취재진이 총동원 돼 취재에 나서게 되고 호위경관이 북로당원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내 수사에 도움을 준다.

1946년 김우종(당시 강원일보 사장) 건국준비위원회 도 위원장이 신탁통치 반대 강연을 하고 있다.

■홍천 신남전투=6·25전쟁 한 해 전인 1949년 8월, 홍천 신남에서 공산군이 대거 침공해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이전까지 38선 인근에서 충돌은 있었지만 이 전투는 38선을 넘어와 중화기까지 동원한 북의 침공이었기 때문에 전국민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 전투를 취재하기 위해 강원일보는 강원도내 최초로 당시 양한웅 사회부장을 종군기자로 특파한다. 양 부장은 최전방까지 나가 생생한 현장보도를 이어갔고, 이 보도는 국군장병의 사기를 높이는 것은 물론 국민들이 군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전장에서는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군의관이 모자란 상황이었고, 춘천의사회 소속 의사들 3~4일씩 교대로 부상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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