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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소설 속 강원도] 우연히 발견한 부채에 새겨진 애틋한 사랑·그리움

이병주 ‘쥘부채’-(93)
인간 존재 의미에 깊은 질문 던져
설악산으로 ‘영원''의 공간 형상화

나림 이병주(1921~1992년) 작가의 중편 ‘쥘부채’는 1969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빨치산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TV문학관 등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지만 소설이 담은 시대적 아픔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던 한계 때문에 원작을 심각하게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소설의 주인공 동식은 눈 덮인 영천 고개에서 낡은 쥘부채 하나를 발견한다. - 여기서 쥘부채는 접었다 폈다를 할 수 있는 부채를 말한다. - 섬세한 나비 그림이 새겨진 쥘부채는 마치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처럼 기묘한 아름다움과 음습한 기운을 동시에 내뿜으며 동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설악산 조난 사고 소식이 흘러나오고, 동식은 쥘부채를 손에 쥔 채 조난자들의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쥘부채를 통해 설악산 조난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질투심과 동경심을 동시에 느낀다.

“산으로 가라! 해발 1만 척, 산 위에선 에덴 동산의 샘물과 같은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문구를 떠올리며, 동식은 조난자들이 선택한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매료된다. 그들의 죽음은 동식에게는 ‘젊음의 영원한 냉동’, ‘일체의 정열과 압축된 수정’과 같은 이미지로 투영된다.

동식은 깨알같은 글씨로 한글 이니셜 ‘ㅅ·ㅁ·ㅅ’, ‘ㄱ·ㄷ·ㄱ’이 새겨진 쥘부채의 유래를 찾기 위해 교도소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칫솔대로 만들어진 여인의 나상을 보며 쥘부채 또한 재소자의 작품일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그는 쥘부채에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형무관에게 석방된 재소자 명단을 요청하고, 그중 신명숙이라는 여인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다.

신명숙은 20년 형을 선고받고 17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 병사한 여성 재소자였다. 동식은 쥘부채가 그녀의 유품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녀의 이모부 집을 찾아간다.

신명숙의 집에서는 그녀의 영혼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한 청년이 결혼식을 막으려 하고, 동식은 쥘부채에 적힌 글자들이 신명숙과 그의 연인 강덕기의 이름임을 알아차린다.

과거 신명숙과 강덕기는 간첩 혐의로 체포돼 20년 형을 선고받았고, 강덕기는 사형당했다. 신명숙은 17년 수감 생활 동안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쥘부채에 새기며 고통을 견뎌냈던 것이다.

“당신은 죽어 나비가 되고 나는 죽어 꽃이 되리다.”

쥘부채에 새겨진 나비와 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명숙이 죽은 연인 강덕기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동식은 쥘부채를 통해 신명숙의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밝혀내고, 그녀의 영혼 결혼식을 막는다.

그는 쥘부채에 담긴 집념과 사랑의 힘에 감탄하며 인간의 의지가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동식은 쥘부채에 얽힌 모든 진실을 밝혀낸 후, 안산(鞍山·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산)에 올라 쥘부채를 불태운다. 쥘부채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신명숙의 사랑과 그리움은 영원히 남아 동식의 가슴속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처럼 이병주의 ‘쥘부채’는 단순한 미스터리 추적 이야기가 아니다. 강덕기와 신명숙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집념,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병주는 왜 지리산 문학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 안에 설악산을 등장시켰을까.

설악산에서 조난당한 사람을 두고 “죽은 사람은 영원히 젊다”고 말하는 동식의 말 속에서 설악산은 ‘영원’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설악산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는 곳으로서 신명숙과 강덕기의 사랑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상징적 의미를 주는 장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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